순종과 충성으로 함께 한 날들

등록날짜 [ 2004-03-29 17:05:51 ]

작은 지하실 교회와의 만남

1988년 9월경, 18년 가까이 뚜렷한 병명도 없으면서 온 몸에 기운이 없어 괴로움을 당하던 나의 질병 문제 때문에 우리 부부는 삼각산으로 자주 기도하러 다녔다. 삼각산 입구에 뿌려진 수많은 전단지가 중에서 ‘성령이 일하시는 절정의 시간’이라는 문구가 쓰인 흑백의 초라한 전단지 한 장에 마음이 끌린다던 남편은 며칠 후 서대문구 연희동 소재 연세중앙교회에서 열린 부흥성회에 참석했다. “수많은 설교말씀을 들어봤지만 그렇게 능력 있고 권세 있는 말씀은 난생처음이야. 당신도 참석하면 틀림없이 은혜 받고 병도 고칠 테니 같이 갑시다.” 성회에 참석하고 온 남편이 어찌나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는지 도대체 어떤 교회냐고 물었다. 교인이 120명인 개척 2년된 지하실 교회라는 대답에 그런 교회 목사가 어떻게 내 병을 고치겠냐고 비웃으며 따라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성회 마지막 날, 남편의 강권에 못 이겨 연희동 마루터 작은 지하실 교회에 발을 디뎠다.

곰팡이 냄새 때문에 숨도 못 쉴 지경인데다 남편처럼 은혜 받은 사람들이 계속 사람들을 데려와서 60평 교회 안이 운신할 틈조차 없었다. 오후 5시에 시작한 성회가 밤1시가 돼도 끝나지 않으니 성회에 데려온 남편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런데 기도시간이 되자 성도들이 20-30분씩 두 손을 들고 기도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아, 이 교회는 기도 많이 하는 특별한 교회구나’ 매일철야예배가 열린다는 광고에 내일 또 와야겠다고 결심했다.

18년간 앓던 질병에서 고침 받았으니

다음날 매일철야예배에 갔더니 윤 목사님이 죄에 대한 말씀을 하고 계셨다. 20년 가까이 신앙생활 하면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미워하고 다투는 죄만 죄인 줄 알았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이 죄인 줄은 몰랐다. 그런데 윤 목사님을 통해 내가 바로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한 죄인이며 내가 하나님 앞에 범죄한 그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설교 말씀을 듣자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제사음식 먹은 죄, 남편과 부모형제에게 잘못한 죄, 교회 일을 내 의로 한 죄, 교만한 죄 등 죄가 깨달아질 때마다 삼일씩 금식하며 회개했다. 그 때마다 사모님께서 기도해 주셨는데 18년 동안 내 몸에 상주해 있던 기운 없는 병, 위 아픈 병, 아랫배가 얼음주머니처럼 차가운 병 등이 씻은 듯 나았다. 그리고 성령도 받았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내 안에 와 계시고, 내 안에서 거룩한 인격으로 감화와 감동을 하시고, 믿음 안에서 나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 자세히 알고 깨닫고 보니 지난날 의와 교만으로 했던 신앙생활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달아졌다.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결심으로 교회 주방 일을 했다. 집에서 일찌감치 밥해먹고 교회로 와서 물 뒤집어 써가면서 주방 청소하고, 철야예배 후엔 호박죽이나 국수를 끓여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주기도 했다. 주일날엔 칼국수를 끓였다. 한밤중에 청년들이 한 달에 한번씩 열렸던 부흥성회 포스터를 붙이러 갈 때면 풀도 끓여주고 라면도 삶아줬다. 동지섣달이고 여름이고 충성할 사람 손들라고 하면 항상 빠지지 않고 손들었다. 주를 위해서 살라고 18년 앓던 질병 다 치료해주셨으니까 죽기 살기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살리라는 각오와 결심이었다.

지금도 귀에 쟁쟁한 사모님의 기도소리

연희동 성전 시절에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을 꼽으라면 당연 우리 사모님의 애절한 기도소리다. 얼마나 애절하게 눈물 흘려 기도하시는지 지금도 그 기도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목사님은 연희동 때부터 노량진 성전에 올 때까지 계속 몸이 좋지 않으셨다. 목회하시기 전에 온 몸이 썩어들어 가는 병에 걸리셨다가 후에 하나님 은혜로 고침 받았으니 당시에는 무슨 음식이든 제대로 잡수시는 것이 별로 없으셨다. 예배시간만 되면 부축 받아가면서 강단에 서시고, 서 있기조차 힘드시면 혁대를 강대상에 걸쳐놓고 설교하곤 하셨다. 그렇게 몸이 좋지 않으면서도 사모님과 함께 매일 저녁마다 성도 한 명 한 명을 위해 기도해주셨다. 병원 세 군데서 골수암으로 다리 절단 선고를 받은 윤성순 자매도, 시신경이 상했으니 의안을 해야한다던 석병덕 안수집사도, 태반 암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어느 여 집사의 시어머니도 다 그 시기에 목사님과 사모님께 기도받고 깨끗이 치유 받았다. 그 외에도 위암, 폐암, 자궁암, 악한 영에 매인 자 등 현대의학에서 손을 뗀 불치병자들이 수없이 찾아와서 말씀에 은혜 받고 목사님 사모님의 능력의 기도로 깨끗이 치유 받아 “할렐루야!”를 외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등 연희동 60평 작은 지하성전은 하루도 빠짐없이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파도치듯 일어났다.



사모세미나, 기쁨과 감사에 겨운 성도들의 충성

나는 2차 사모세미나 때부터 충성했다. 143명 사모들이 우리 목사님 설교 말씀 듣고 엄청나게 회개하고 능력 받고 변화되니 가스가 얼고 일 못할 상황이 벌어져도 너무너무 감사하고 좋기만 해서 고생인 줄 몰랐다. 3차 사모세미나에는 500여 명의 사모님들이 모였는데 사모님들이 통곡하며 회개하고 영적으로 완전히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목사님들의 “우리 사모가 사모세미나 가더니 완전히 변화돼서 돌아왔습니다.”라는 감사의 전화가 수도 없이 걸려왔다. 이 사모세미나의 소문이 퍼져서 지금은 수천 명의 목회자들이 모이는 목회자 부부세미나로 발전했다. 사모세미나 초창기에는 기도원이 없어서 성회를 열 때마다 기도원을 빌렸는데 시설이 열악해서 씻을 데가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임시로 가스 불을 설치하고 큰 통을 사다가 물을 데워서 일일이 사모님들을 씻게 해드렸다.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할 일이 많았지만 교인들이 한 사람도 힘들다 소리를 안 하고 신바람 나서 일했다. 목사님 사모님들이 변화되어 돌아가면 개 교회 수많은 성도들이 변화되고, 수많은 불신자들이 전도 받아 구원받을 일을 생각하면 그저 기쁘고 좋아서 추운지 더운지도 모르고 땀을 흘렸다.

망원동 시절, 고생인 줄 모르고 한 은혜와 감사의 충성

망원동 성전으로 이사했을 때는 교인이 400명 정도 됐을 때였다. 좁은 성전에 있다가 600-700명 앉는 넓은 곳에 오니 좋았지만, 식당이 길 건너 지하실에 있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달에 한번씩 열리는 부흥성회 때마다 멀리 사는 성도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해야 했는데, 식당이 지하실이라 하수도 물이 빠지지 않으니 늘 양수기를 대고 물을 퍼 올렸다. 그런데 워낙 물을 많이 쓰니 양수기가 고장이 날 때도 많아서 일일이 물을 퍼내기도 했다. 부흥성회 때면 사시사철 집에도 못가고 늘 식당에서 지내면서 다음 성회 날 식사준비를 했다.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받은 은혜 감사해서 자원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하여튼 당시엔 참으로 볼품없는 지하식당이었지만 목사님 설교말씀에 성도들이 다 은혜 받으니 고생고생 말도 못해도 고생인 줄 모르고 일했다.

순종으로 뛰어든 교회 살림

노량진 성전으로 이사 온 후 몇 년간 지역장을 했다. 내가 50살이 되던 해에 지역장을 50살까지만 세우겠다는 말씀이 있었다. 당시 교회 식당을 책임지고 맡을 사람이 없었는데 목사님과 사모님이 그 해에 여집사 안수를 받은 나를 교회 살림하는 일에 쓰시려고 기도하신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심방하고 거룩한 일 하고 싶지 구정물에 손 넣고 여러 사람들과 부딪히는 식당 일은 하고 싶지가 않아서 나를 임명할까봐 미리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고 눈물이 났다. 그러던 중 하루는 새벽 기도하고 잠깐 눈을 붙이는데 꿈에 성령께서 교회 마당에 떨어진 지푸라기서부터 남녀 화장실의 찌들어 붙은 오줌 때에 이르기까지 교회 구석구석 더러운 것들 다 치우며 교회 살림을 하라고 하셨다. '성령께서 이미 나를 임명하시는구나' 싶어 혼자 며칠을 울고불고했다. 12월이 되자 정말 강단에서 충성실로 임명하시니 할 수 없이 맡겨진 대로 순종했다. 성령께서 시키신 대로 남자 화장실 여자 화장실 일일이 다니며 엄청난 오줌 때를 몸살이 나도록 닦아냈다. 그리고 교회 마당에 떨어진 지푸라기 하나 다 줍고 매일 치우고 닦고 하면서 일년을 식당에서 보냈다.

흰돌산 수양관지기로 부르신 주님

그 이듬해인 1995년 12월 14일, 교회에서 흰돌산 기도원을 인수하러 가는데 나도 부엌살림을 인수 맡으러 갔다. 각 분야별로 인수를 다 맡은 후, “인수 다 맡아 놓고 여기 기도원은 누가 지켜요?”라고 사모님께 물었더니 “집사님이 지키세요.”라고 하시는 말씀에 순종해서 그날로 장영애 집사님이랑 흰돌산 기도원에 남은 것이 올해로 9년째다. 그 후로 기도원 관계자들이 속속 들어오셔서 기도원 식구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당시에 낡은 건물에 종이 하나 있었는데 새벽종을 치면서 날마다 새벽기도를 드렸다. 이인호 목사님 설교에 은혜 받고 얼마나 울었던지…. 그렇게 기도원에 와서 좋을 수가 없었다.

남편 안선환 집사는 당시 교회 직원으로 있다가 나보다 1년 반 늦게 기도원으로 들어왔다. 결혼하고 집안 살림은 별로 안 해 보고 늘 교회 일만 했으니 남편에게 미안하면서도 감사한다. 슬하에 딸 아들 둘을 뒀는데 다 우리 연세중앙교회에 와서 은혜 받고 믿음 안에서 바르게 자라주었다. 딸 양희는 예수 찬양선교단으로 활동하며 복음을 수종들다가 지금은 결혼해서 아이 셋 낳고 주부 그로리아로 충성한다. 아들 재영이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우리 교회에 와서 얼마나 은혜를 많이 받았는지 통학버스 속에서도 늘 눈물 흘려 회개하고 학교에 가서도 톰슨 성경책을 꼭 가지고 다니면서 친구들에게 전도했다. 대학갈 때 신학을 하고 싶어 했지만 당시 우리 목사님처럼 목회하는 것이 자신이 없다며 자기는 사회복지를 하면서 충성한다고 하더니, 지금은 사회복지선교에 비전을 갖고 신학대학원에 다니고 있다.

순종, 그것 하나 보시고

나는 연세중앙교회의 연희동 시절부터 함께하면서 우리 교회가 이렇게 큰 교회로 성장할 것과, 우리 목사님 사모님이 큰 목회하실 분인 것을 확신했다. 그렇게 말씀에 능력과 이적이 나타나고 성도들이 성령 충만 받아서 천국을 소망하며 영혼의 때를 위해 살게 해주시니…. 그 때 목사님은 예수를 알지 못해 지옥 가는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 오백억짜리 큰 교회를 짓는다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조금도 그 말씀이 허황된 말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목사님 사모님의 믿음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꼭 책임지시는 것을 보아왔으니까….

이제껏 내가 주님 위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충성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하나 내가 잘나서 한 것이 없다. 전국의 수많은 목사님과 사모님, 직분자, 청년대학생들, 중고등부 학생, 주일학교 학생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귀하고 값지게 쓰시는 윤 목사님과 사모님의 성령에 감동된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순종한 그것 하나 보시고 지금껏 써 주신 것이라 믿는다. 나는 많이 배운 것도, 돈 많은 것도, 잘사는 것도 안 부럽고, 오직 교회 안에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지금까지 감사할 따름이다.

신앙생활하는 동안 때때로 힘들로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뒤돌아보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와 우리 가족에게 하늘의 면류관을 준비케 하시는 인내와 연단의 시간들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오늘도 성령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믿으며 다시 오실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심정으로 내게 맡겨주신 사명 잘 감당하기 위해 손발을 걷어붙이고 땀방울을 흘린다.

2004년 3월 흰돌산 수양관에서 김효영 여집사.

위 글은 교회신문 <5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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