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땅을가다-8] 두란노 서원이 있는 에베소
사도 요한과 누가의 무덤 등 많은 유적이 있는 곳

등록날짜 [ 2010-02-01 11:24:34 ]

에베소는 서부 소아시아의 에게 해 연안(현재 터키)에 위치해 있으며,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의해 기원전 7~6세기에 건립된 식민도시로, 구 에베소와 신 에베소로 구분된다. 구 에베소는 고레스산과 피온산의 계곡지역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항구에 연결되어 있었다. 신 에베소는 아야술룩 언덕이 있는 사도 요한 교회유적, 성채 그리고 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는 신 시가지를 말하며 신 에베소를 ‘셀죽크’라고 부른다.
구 에베소 유적은 주전 3세기경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 중 한 사람인 리시마쿠스에 의해 건설되고,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는 인구가 20만을 넘었으며, 오늘날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유적들은 로마시대에 만들어졌다.
고대 에베소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야외 원형극장은 2만5,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이다. 원형극장 오른편에는 상업 및 무역 도시의 현장인 100m 정방형 크기의 아고라가 있었다. 아고라의 동북 편에는 두란노 서원으로 불리어진 유명한 에베소 도서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적을 볼 수 있다.


<사진설명> 에베소의 원형극장(좌), 유적지 입구 '누가의 묘'(우)

요한의 무덤
주후 50년대에 사도 바울은 두 번에 걸쳐 에베소에 찾아와 복음을 전파했다. 성경에 에베소에서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행19:8-10)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아르테미스 신전을 이용하여 큰돈을 버는 데메드리오의 소동으로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지만 신앙의 부부동역자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헌신적 협력, 디모데의 힘이 결집되어 복음의 열매를 많이 맺었다. 에베소에서 근 3년 동안에 복음이 아시아에 두루 확산되어 골로새, 히에라 폴리,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세워지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사도 요한은 예루살렘이 로마인들에 의해 파괴되기 직전에 에베소로 옮겨와서 에베소교회의 감독이 되었고, 그 지방의 다른 교회에 대한 관할권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도미시안 황제의 기독교 박해시대에 밧모 섬에 유배를 당했다가 풀려 나와서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을 뻔한 위험을 수없이 겪었지만 주후 100년경에 에베소에서 평안히 숨을 거두었다.
요한의 무덤은 아야술룩 언덕의 중앙 기슭에 있다. 이 무덤 위에 최초 조그마한 교회가 세워졌으나 주후 6세기에 유스티니안 황제에 의해 그곳에 웅장한 교회를 세웠다. 사도 요한의 무덤은 교회의 중앙에 위치한 마루의 바로 밑에 있는 방에 안치되었다. 요한의 무덤 근처에 있던 샘물과 무덤에서 나오는 재 같은 먼지가 치유의 능력이 있어 병자들이 많이 모여들고 기독교인들에게 순례지의 중심이 되었다.

누가의 무덤
누가의 고향이 어디인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제롬에 의하면 안디옥 사람 누가 의원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누가는 수리아 안디옥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바울과 동행한 최후의 동역자였다(딤후4:11). 그는 성경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으며 주후 100년경 74세의 나이로 순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무덤이 어느 곳에 있는지 확실치 않다. 옛 에베소의 변두리에 ‘누가의 무덤’이라는 안내 표지판이 초라하게 서 있다. 이 표지판의 기록을 보면 이곳은 로마시대의 신전이 있었으나 비잔틴시대에 와서 예배 처소로 사용되었다. 주후 1860년 영국 고고학자 우드(T.J Wood)가 이곳에서 발굴 작업을 하던 중 십자가와 황소 모양의 비석이 발견되어 누가의 무덤으로 판명되었다는 것이다.
/고영대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17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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