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땅을 가다 13] 부유 속에 방탕했던 도시, 사데
상공업도시로 번영… 형식적 신앙 ‘생명력’ 없어

등록날짜 [ 2010-03-17 09:36:00 ]

현세의 부귀영화 누렸으나 회개의 촉구 듣지 않아 멸망

 
사데지역은 아르테미스 선전의 크기에 비해 왜소했던 사데교회의 건물만큼 신앙의 꽃을 피우지
못하고 망하게 된다. 사진은 유적만 남아있는 사데교회.


사데(Sardis)는 소아시아 서부지방의 주전 6세기 리디아왕국의 수도로, 서머나 동쪽 약 80km, 두아디라 남동쪽 약 48km 지점, 트몰러(Tmolus)산 북쪽 기슭, 헐머스 평야 남단에 자리 잡은 오늘날 사르트(Sart)라는 마을이다. 그 당시는 대도시였지만 지금도 유적만 남아 있다.

사데를 끼고 흐르는 시내는 황금천이라 부를 만큼 많은 사금이 있었다. 그곳에서 크로이소스왕(Croesus, 주전 560~주전 546년)은 마음껏 부를 누렸으며 주전 700년경 세계 최초로 금으로 만든 각인주화를 만들어 사용했다. 리디아왕국은 크로이소스왕 때에 전성기를 맞아 소아시아 서해안까지 국토를 넓혔다.

번영했던 리디아의 수도인 사데는 주전 540년대 페르시아 고레스(Cyrus) 왕의 군대에 의해 침략을 받은 후 불타 버렸으며 이때에 크로이소스왕도 불타 죽었다. 그 후 셀쥬크 왕조의 영토가 되었다가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20세기 초에 미국 프린스턴대학팀에 의해 아르테미스 신전과 리디아의 무덤이 발굴되었고 1958년 이후 미국 하버드대학과 코넬대학 합동 발굴단의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다. 순금을 제련하던 도가니가 무려 300개 이상이나 발굴되었고, 도가니 밑바닥에는 순금이 그대로 남아있어 크로이소스왕의 전설적인 부가 역사적 사실임이 분명하게 밝혀졌다.
당시 임신, 출산, 다산 및 풍요의 여신으로 숭배되었던 아르테미스 신전은 주전 330년대 알렉산더 대왕의 명령으로 건축되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길이 100m, 폭 50m로 큰 규모의 신전이었다. 그곳에 78개의 석주와 18m 높이의 이오니아식 석주 두 개가 서 있어 신전의 웅장함을 말없이 입증해 주고 있다.

아르테미스 신전 남쪽 강단 밖에 있는 붉은 벽돌의 작은 터전은 비잔틴시대의 교회가 세워졌던 곳이다. 최초에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교회로 사용하다가 강단 밖에 작은 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드렸다. 주후 3세기에 대리석으로 건축된 김나지움(Gymnasium, 체육관)의 유적이 있다. 로마시대에 건축된 체육관으로 전면 부분은 복원되어 있다. 김나지움의 옆에는 1,000명 이상 들어갈 수 있는 시나고그(Synagogue)가 발굴되었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회당 가운데 최대 규모이다.

이밖에도 유적에서 페르시아시대의 토기 조각, 크로이소스왕의 각인이 있는 금화 그리고 로마시대의 목욕장, 스타디움(Stadium) 등 비잔틴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다. 그 결과 사데가 리디아 시대뿐 아니라 주전 7~6세기에 걸쳐 오랫동안 동서 교통의 요충지로 번영하였음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해 주었다.

이곳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부도덕한 제사의식이 거행되었다. 요한계시록에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는 경고를 받게 된 것도 이와 같은 부도덕한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계3:1).

사데교회는 라오디게아교회와 더불어 일곱 교회 가운데 칭찬이 없고 책망만 받은 교회였다.
사데는 상공업도시로 번영했으며 직물과 귀금속 생산지로 이름이 났었다. 풍요 속에 사치와 음탕에 빠졌고, 교회는 신앙의 이름과 형식은 있었으나 생명력이 없었다. 그래서 회개를 촉구했고 회개치 않으면 주님이 도적같이 오실 때 알지 못한다고 했다(계3:3). 

위 글은 교회신문 <18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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