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열왕 이야기 <45>] 마지막 종교 개혁도 실패로 끝나
유다 요시야 왕(2)

등록날짜 [ 2013-01-22 11:40:32 ]

우상숭배로 사회적.신앙적 부패 극에 달해
뒤늦은 개혁이었지만 결국 일어서지 못하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다 같이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에 멸망당하고 이 땅에서 사라졌다. 남유다는 아직 남아서 멸망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그러다가 므낫세 왕을 지나자 하나님께서는 남유다를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다. 이방 나라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전이 훼파되도록 허락하기로 하신다. 이는 주의 백성을 버리시겠다는 하나님의 작정을 의미한다.

말씀에 의지하여 종교 다원화 버려
요시야 왕은 므낫세의 손자로, 여덟 살 때 왕이 되었다. 감사하게도 요시야 왕은 어렸을 적부터 신앙심이 깊었는데, 왕이 되자마자 하나님의 성전을 가장 귀히 여기며 관리한다.

어느 날,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한다. 그때까지 율법책 없이 종교 생활을 했던 것이다. 마치 중세 교회처럼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는 교회가 이 땅에 있었던 것이다. 율법책이 없던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해 보자.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던 남유다의 주소였다.

율법책을 발견한 후, 요시야 왕은 그 책을 읽으며 회개하고 눈물을 흘린다. 그 후 자신의 모든 정치력을 동원하여 종교 개혁을 일으킨다.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이란 다름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대로 준행하는 것이었다. 이때 종교 개혁에서 가장 우선하는 과업은 우상을 척결하는 작업이었다. 혼합주의를 버리고, 종교 다원화를 거절하는 것이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진 유다의 멸망을 말씀하시며 그 이유를 분명하게 알려 주신다.

“이는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 손의 모든 소위로 나의 노를 격발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나의 이곳을 향하여 발한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왕하22:17).

요시야 왕은 뒤늦은 개혁이지만 온 힘을 기울여 종교 개혁을 한다. 그 종교 개혁의 내용이 열왕기하 23장이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모든 백성과 함께 말씀대로 준행할 것을 언약하고, 여호와의 말씀이 언급하지 않은 모든 종교 행위를 버리게 했다. 우상을 섬긴 제사장들은 자격을 박탈했고, 우상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부패, 특히 성적 부패를 정리했다. 각 가정이 안일하게 우상에 빠지던 산당들을 제거하였으며, 이방 종교를 흉내 내는 모든 악습을 타파했다. 무당과 점쟁이 등 모든 ‘귀신’ 종교의 중개자들을 제거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유월절을 지키기 시작한다.

요시야 왕이 행한 이러한 모든 종교 개혁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박수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왕하23:24).

요시야 왕의 죽음
당시 주변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대제국 앗수르는 주변 국가들에 곤혹을 당하다가 주전 612년 마침내 메대와 바벨론 연합군에 니느웨가 함락된다. 하지만 여기서 탈출한 일부 왕족들과 군사들이 하란으로 피신해서 마지막 저항을 하고 있었다. 이때 바벨론이라는 새 제국이 들어서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애굽의 바로 느고가 앗수르 군대를 도와주려고 하란으로 가고 있었다.

앗수르가 멸망하기를 고대하던 요시야는 이때 느고의 원정을 막으려고 므깃도로 올라갔다가 불행히도 그곳에서 부상을 당하여 전사한다. 이 선한 왕 요시야가 왜 죽었을까? 평행본문인 열왕기는 이 점에 침묵하지만, 역대기는 답변을 시도하고 있다. 본문에 의하면, 느고가 자신의 원정이 하나님 계획의 일환이라고 밝혔는데도 요시야가 이 경고를 듣지 않았다는 것이다(대하35:21). 이 문제는 이견이 분분하다.

느고의 증언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본문을 가감 없이 그대로 읽는다면, 요시야 같은 선한 왕도 이 같은 판단 실수를 범한다고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요시야에 관한 마지막 평가에서 보듯(대하35:26~27),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범한 결정적인 잘못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32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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