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과 훌] 부활의 은폐

등록날짜 [ 2022-05-06 08:30:05 ]

올해는 지난 4월 17일(주일)이 부활절이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확히 어느 날에 부활하셨는지는, 당시에 지금처럼 통일된 달력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논쟁할 의미가 없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기념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오늘날 수많은 나라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당시가 봄이 시작되던 시기라는 역사적인 사실에 맞춰, 춘분이 지나고 첫 보름달이 뜬 다음 돌아오는 주일을 부활절로 통일한다. 그리고 지금은 전 세계가 쓰고 있는, 하나님의 7일 주기력대로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제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산자와 죽은 자의 주(主)가 되셨으므로(롬14:9) 우리에게 더는 일요일이 아니라 주일(主日)이 되었고, 해당 주일을 부활절로 더 특별히 기념하기로 한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 국가 대부분은 부활절을 포함한 전후 3~4일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수세기 전부터 축제로 즐기곤 했다. 성탄절이 주인공 예수 그리스도는 뒷전인 채 산타클로스와 향락의 축제로 변질된 것처럼 부활절도 점점 퇴색해 가지만, 부활의 사실을 가장 고통스러워하고 은폐하려 드는 세상 임금, 세상 풍조에 맞서 지금도 초대 교회처럼 부활을 전하는 성령의 교회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요즘 세대는 믿기 어렵겠지만, 한국교회는 1970년대 부활주일 새벽마다 교파를 초월해 성도 100만 명 이상이 여의도광장에 가득 모여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올려 드렸다. 당일 새벽에는 자리를 잡을 수 없기에 전날 밤부터 아스팔트 바닥에서 기도하며 밤을 지새웠다.


영원 전부터 살아 계시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함께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내 죄를 대신해 딱 삼 일 죽어 계셨을 뿐이기에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제삼 일에 부활하신 매 주일이 부활주일이다. 또 부활의 첫 열매 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 죽을 몸도 죽지 않을 몸으로 다시 살 부활의 산 소망(벧전1:3)을 주셨으니 부활은 매일의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1970년대 같은 열정은 고사하고, 부활을 위해 우리 주님이 겪으신 고난을 생각하는 사순절에 비해 부활절은 그저 하루 만에 지나 보낸다. 바울조차도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빌3:10~12)라고 고백한 것처럼, 고난이 목표가 아니라 고난을 통해 “어찌하든지” 부활에 참여하고자 하는 열망을 묵상해 보면, 사순절과 부활절의 밸런스는 부활이 얼마나 교회 안에서 은폐되고 있는지를 발견된다. 찬송가, 복음성가, CCM에서도 부활 찬양이 거의 없고, 찬양대의 선곡에서 부활 찬양을 1년에 얼마나 하는가만 봐도 부활의 은폐는 밝히 드러난다. 18세기 헨델의 ‘메시아’에서 부활 편은 전체 3부 중 후반 1부를 차지할 만큼이지만, 지금 교회음악은 마치 한두 단어 부활 내용을 품고 있다고 부활 찬양이라고 주장하며 그나마도 부활절에나 부르는 정도랄까. 


그만큼 세상은 ‘부활’이 언급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초대 교회 사도들은 가룟 유다의 보결로 저희와 함께 다니던 자 중에서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자”(행1:22)를 뽑기 위해 맛디아를 선택했고,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신 후에야 예수의 하신 말씀과 성경을 믿게 되었다(요2:22). 또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으로 모든 사람들이 믿을 만한 증거”(행17:31)가 되셨고 초대 교회 성도들이 붙잡혀 순교당한 이유는 “예수를 들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행4:2) 그랬다고 했다.


같은 교회라도 부활의 도를 전하는 교회는 핍박을 받는다. 『내가 자랑하는 복음』의 저자인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가 “혹시 내가 요즘 부활을 덜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늘 채찍질한다”라고 말했듯이 성령의 역사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함을 느낀다. 요즘 같은 시대에도 ‘산소망(Living Hope)’ 같은 찬양이 만들어지고, <부활(Risen)> 같은 영화가 제작되어 은혜를 전하는 데 교회 안에서도 요상한 비평이 있는 것을 보면 역시 부활은 핍박을 받는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15:17). 전능자가 오셔서 다시 사심으로 성자 하나님이 내게 오셨고, 내 곁에 계심을 증거로 보이셨고, 지금 내게 계신데 내가 여전히 행함 없는 믿음으로 죄 가운데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내게 부활은 교리일 뿐 실제가 아니다. 부활을 소유하면 부활의 산 소망을 목표 삼아 삶의 이정표가 바뀐다. 불치병 환자조차도 병은 안중에 없고, 부활해 주님을 빨리 만나기를 가슴 설레고, 그러다 주님 은혜로 완치라도 되면 오히려 아쉬워하는데 ‘정말 부활을 산 소망으로 소유한 사람은 당연히 그렇겠구나’ 이해가 간다. 그래서 카타콤의 순교자들은 지옥 같은 토굴도 괴로워하지 않았으리라. 


위 글은 교회신문 <747호> 기사입니다.


박성진 집사
연세오케스트라상임단장
㈜한국M&A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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