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전도회 5그룹 전도초청잔치
“예수 믿어 영혼의 때에 행복합시다!”

등록날짜 [ 2025-10-20 16:12:24 ]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거룩한 실천이
삶에서 지속해 나타나지 않는다면
내 믿음의 실상을 꼭 점검해 봐야
단순한 감정이나 신령한 체험보다
일상의 신령한 열매가 참신앙 증거
18세기 미국의 신학자 조너선 에드워즈가 질문을 던졌다. “뜨거운 눈물이 진짜 믿음의 증거가 될 수 있을까.” 당시는 영적 대각성 운동으로 들끓던 시기였다. 예배마다 사람들이 통곡했고, 몸을 떨었으며, 쓰러지기까지 했다. 이전의 메마른 신앙과는 완전히 다른 뜨거운 열기가 교회를 휩쓸었다.
에드워즈는 이 현장 한가운데 있었다. 이 모든 현상이 정말 성령의 역사인가, 아니면 단순한 감정적 흥분이나 사단의 속임수인가. 그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신앙감정론』을 썼다. 30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통찰은 우리에게 도전을 던진다.
‘자기중심성’이 가져오는 신앙의 오해
에드워즈의 첫 번째 주장은 명확하다. “참된 신앙은 반드시 거룩한 감정을 동반한다.” 많은 사람이 신앙을 지식이나 의무로만 여긴다. 성경 말씀을 알고,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에드워즈는 단호히 반대한다. 감정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다.
여기에서 ‘감정(affections)’은 단순한 기분이나 충동적인 ‘격정(passions)’과 다르다. 격정은 이성을 압도하는 맹목적 흥분이다. 그에 반해 감정은 지성과 함께 작동하는 영혼의 방향성이다. 사랑하거나 미워하고,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마음의 움직임 전체를 의미한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할 때, 단지 머리로만 ‘사랑해야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이 움직이고, 온 존재가 그 대상을 향한다. 하나님과의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기쁨, 죄에 대한 슬픔과 미움이 없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믿음이 아니다.
에드워즈는 곧바로 경고한다. “또 감정이 있다고 해서 다 참된 믿음의 증거는 아니다.”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가짜 증거가 너무 많다.
첫째, 감정의 강도이다. 예배 시간에 눈물을 쏟았고, 찬양할 때 전율이 흘러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체험했다면, 이 은혜가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넌 직후 감격에 겨워 하나님을 찬양했지만, 사흘도 안 되어 원망했기 때문이다.
둘째, 신비한 체험이다. 기도 중에 성경 구절이 갑자기 떠오르거나, 음성을 듣는 듯한 경험이 곧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는 아니다. 사단도 성경을 잘 안다.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성경을 인용했다.
셋째, 다른 사람의 인정이다. 교회 친구들이나 신앙 선배들이 칭찬한다고 해서 안심할 수 없다. 사람은 겉모습만 보지만, 오직 하나님만 중심을 보신다.
넷째, 강한 확신이다. ‘나는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아무리 강해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조너선 에드워즈의 통찰은 날카롭다. 가장 강하고 흔들림 없는 확신은 종종 위선자들에게서 발견된다. 참된 성도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늘 자신을 점검한다.
왜 이런 현상들이 참된 믿음의 증거가 될 수 없는가. 에드워즈는 “이 모든 현상들이 성령의 역사가 없어도 충분히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답한다. 자연적인 심리 현상으로도, 심지어 악한 영의 역사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이 모든 가짜 증거의 공통점은 자기중심성이다. 내가 느낀 감정, 내가 받은 체험, 나에 대한 인정, 나의 확신. 결국 ‘나’를 중심에 놓고 있다.
진짜 증거는 이와 정반대의 특징을 갖는다. 성령만 할 수 있는 일, 사단이 절대 모방할 수 없는 역사가 바로 참된 믿음의 표지이다.
참믿음의 증거 ‘예수님 닮아 가기’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참된 믿음의 증거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의 은혜가 다른 은혜로 이어지는 유기적인 관계이다.
첫 번째 증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의 전환이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 이유를 들어 보면 “나를 구원해 주셨으니까”, “내게 복을 주시니까”라고 답한다. 이것은 결국 자기 사랑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이다.
참된 사랑은 다르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주시든 주시지 않든, 그분 자체가 무한히 아름답고 거룩하시기 때문에 사랑한다. 욥이 모든 것을 잃고도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라고 고백한 이유이다.
두 번째 증거는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보는 새로운 영적 감각이다. 위선자도 하나님의 능력에 놀랄 수 있고, 마귀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안다. 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 그분의 사랑과 공의와 자비의 아름다움에 매료되는 일은 새로운 마음을 받은 사람만이 가능하다. 이 새로운 영적 감각이 생겼기 때문에 거룩하고 아름다운 그분 자체를 사랑하게 되는 전환이 일어난다.
세 번째 증거는 본성의 갱신이다. 거짓된 감정은 일시적이지만, 참된 은혜는 사람의 근본적인 성향과 본성 자체를 영속적으로 새롭게 한다. 은혜로운 감정은 영혼 안에 지속적인 영향을 남긴다. 감정이 사라진 뒤에도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갈망이나 죄에 대한 민감함 같은 ‘영적인 맛’이 영혼에 남아 있다. 지난날 자연스럽게 끌리던 죄의 습관이 풀리고, 거룩함을 사랑하는 새로운 성향이 삶을 주도한다. 이것이 일시적인 흥분과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네 번째 증거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는 모습이다. 본성이 새로워졌다면, 사랑, 온유, 오래 참음, 용서, 긍휼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그런 반면 거짓된 감정은 분쟁, 시기, 비난, 거친 태도로 드러난다.
다섯 번째 증거는 진정한 겸손이다.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알게 되면 필연적으로 자신의 비참함을 깨닫게 된다. 거짓된 감정은 ‘내가 이런 체험을 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믿음이 좋다’라며 영적 교만을 낳지만, 참된 은혜는 하나님의 무한한 거룩함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절실히 안다. 바울이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딤전1:15)라고 고백한 이유이다.
<사진설명>조너선 에드워즈 著 『신앙감정론』(1746)
최고의 증거 ‘삶의 열매’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모든 증거 중 가장 중요한 증거는 ‘그리스도인의 실천’, 즉 삶의 열매이다. 왜 이것이 최고의 증거인가.
첫째, 실천은 마음속 은혜의 목표이자 완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단지 천국 티켓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둘째, 실천은 시련 속에서 믿음의 진실성을 시험하는 가장 확실한 시금석이다. 말과 감정은 속일 수 있지만, 어려움과 유혹 앞에서도 계속 순종하는 삶은 속일 수 없다.
셋째, 실천은 마지막 심판 날에 사용될 유일한 증거이다. 예수님은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20)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 실천은 종교적 의무가 아니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전인격적인 충성을 의미한다. 직장에서의 정직, 가정에서의 사랑, 이웃을 향한 긍휼이 평생에 걸쳐 꾸준히 나타날 때, 그것이 참된 믿음의 가장 확실한 증거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이 있다. 에드워즈가 정의한 ‘감정’은 행동의 근원이 되는 힘이다. 따라서 마음의 감정이 진정으로 거룩하게 변화했다면, 삶의 실천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다. 실천은 믿음을 증명하는 외적 수단이 아니라, 변화된 내면의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그래서 우리의 할 일은 분명하다. 먼저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다. 가짜 증거에 의존하고 있다면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참된 믿음을 주시고, 거룩한 감정을 부어주시고, 삶의 열매를 맺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면 된다. 중요한 점은 방향성이다. 하나님을 향해, 거룩함을 향해 계속 나아가는 일이다. 조너선 에드워즈가 300년 전에 던진 “당신의 믿음은 진짜입니까?” 질문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지만 이 불편함이야말로 은혜의 시작이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기 시작한다.
위 글은 교회신문 <92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