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 지상강의 ‘산상수훈’] 심령의 가난을 채워 줄 이는 오직 예수
윤석전 목사 지상강의 ‘산상수훈’(7)

등록날짜 [ 2013-05-14 15:50:30 ]

기독교는 문화가 아니며 종교적 수양도 아닌
예수로 말미암아 천국을 사모하고 침노하는 것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를 위하여 친히 가난해지셨다고 성경은 말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8:9). 즉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니고는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내 가난한 심령을 예수 앞에 내보일 때 이 땅의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부유를 주님께서 채워 주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 있나니”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가난한 자를 도우러 오셨기에 심령이 가난하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주님의 도움을 크게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게 없는 분량, 모자라는 분량, 깨닫지 못하는 분량이 얼마만큼이며, 내 무능한 분량이 얼마만큼인지를 많이 깨달을수록 주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로 채워야 할 가난
우리의 가난한 심령을 부유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부유의 분량이 얼마만큼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피 흘려 죽으시고 내놓으신 그 영광만큼입니다. 그 부유를 채워 주실 분은 지구상에 아무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우리는 “내가 얼마나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할 것인가? 나의 가난한 분량이 얼마만큼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의 아들로 채우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천국으로 채우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가난한 존재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분량을 느끼는 만큼 신앙생활을 열심히 합니다. 자기 심령의 가난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 신앙생활을 잘해보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천국을 사모하고 또 사모하면 천국을 침노한다는 말이 맞습니다. 천국은 그렇게 침노하는 자에게 빼앗긴다고 했습니다(마11:12~14). 세상 말에도 세끼 굶으면 담 안 뛰어넘을 자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천국으로 채워야 할 심령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있는 물질로 부유를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물질의 부유는 우리가 아무리 가졌다 한들 육신이 끝나는 순간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영혼을 위한 부유에는 전혀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가 육신의 때에는 부잣집 문전에서 얻어먹는 거지 신세였지만 육신이 끝나는 순간부터는 영혼의 부유로 처지가 달라졌습니다. 그가 지상에 있을 때 천국의 부유를 얻었기 때문에 하늘에 가서 천국을 얻은 것입니다.

이처럼 지상에 있을 때 자기 심령에 천국을 채우지 못한 자는 절대 죽은 후에 천국을 얻을 수 없습니다. 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듯이, 육신으로 사는 동안 심령의 가난을 채우지 못한 자는 하늘에 가서 누릴 부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육체가 있는 동안 예수의 생명과 천국으로 심령을 채워야 합니다. 그 옛날 믿음의 선배들이 은혜를 사모한 이유는 그만큼 자신의 가난한 분량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물질문명의 발달로 심령의 가난을 느끼지 못하고 신앙생활이 하나의 문화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자기가 심령이 얼마나 가난한자인지 스스로 알고 채우려고 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있으니 정신 차려야 합니다. 기독교를 문화로 알면 큰일 납니다. 기독교는 지상에 있는 문화 중 하나가 아니라 하늘의 영원한 문화입니다. 이 문화는 사라지지 않고 쇠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종교적 수양을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예수로 거듭나서 변화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자기 육신이 가장 큰 우상이 된 시대입니다. 신앙생활은 그다음입니다. 우리의 생활을 가만히 보십시오. 지금 기독교가 얼마나 타락했습니까?

먼저 확보해야 할 하늘의 부유
주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에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6:33). 지구상에서 ‘그 나라와 그 의’를 우선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육신을 우선합니다. 오죽하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복의 말씀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보면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 다음에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했습니다. 그 나라와 그 의가 우선이고 그다음에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우선 육신이 있을 때 그 나라를 확보해 놓은 다음에 육신의 필요를 구하라는 의미입니다. 영적인 것이 확보되지 않으면 네 육신에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우리는 육신이 있는 동안 하늘의 부유를 확보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부유를 확보하지 못하면 머지 않아 비참한 날이 닥쳐온다는 말입니다.

“복이 있나니”라는 말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채워 줄 복이 준비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 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채워 줄 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자기 자신을 천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그분을 내 안에 모시면 영혼의 때에 영원히 삽니다. 천국에 갑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천국을 주시려고 자기 자신이 천국의 신분으로 왔으니 누구든지 심령이 가난하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심령의 부유는 다른 방법으로는 절대 채울 수 없고 오직 예수로만 채울 수 있습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3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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