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 지상강의 ‘산상수훈’] 애통하는 회개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라
윤석전 목사 지상강의 ‘산상수훈’(10)

등록날짜 [ 2013-06-05 17:14:04 ]

죗값으로 죽게 된 자신을 볼 줄 알아야 애통하게 돼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만이 우리의 위로자

예수께서는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복은 바로 위로입니다. 우리는 왜 애통해야 하는지, 무엇을 위로받아야 하는지를 확실하게 발견해야 합니다.

속죄의 은총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란 먼저 자기가 지은 죄를 보고 그 죗값으로 죽어가는 자신이 안타까워 우는 자입니다. 자기 죽음을 보고 혼자 해결할 수 없어서 몸부림을 치면서 우는 까닭에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로가 어디서 오는지 분명히 알고 나를 위로해 주실 분을 향하여 울어야 합니다.

애통하게 하는 율법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은 “네 죽게 된 죄의 모습을 보고 울어라. 나는 너의 죄를 속죄하고 위로해 주러 왔다. 그 목적을 네가 달성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지은 죄를 보고 울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들은 죄 때문에 울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고 그 증거로 성령이 심령에 와 계십니다. 하나님께 위로받았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위로를 주려고 율법을 보내셨습니다. 율법을 바라보고 “네가 죄인임을 자각하라! 네 죽게 된 모습을 발견하라! 그리고 율법 앞에 무릎 꿇고 애통하라! 그러면 복음으로 위로해줄 것이다!”라는 의도에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이 애통하게 하는 법이라면, 복음은 위로하는 은혜의 법입니다. 율법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깨닫는 자를 복음이 위로합니다. 그래서 율법과 복음의 조화를 알아야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죄를 보고 울게 하는 법입니다. 죄를 보고 울지 않는 사람은 율법을 모르는 자입니다. 우리는 모두 법을 초월하는 자가 되지 말고 법 아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법을 초월한 자는 절대로 애통하지 않습니다. 법 아래에 있는 자만 애통합니다. 우리에게는 항상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애통할 만한 조건이 있어야 하고 애통할 환경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를 발견하는 서치라이트 같은 것입니다. 율법을 보고 죄를 발견하고 그 죗값인 사망을 보고 우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로 위로받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는 회개
죄를 보고 울지 않는 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속죄의 효력이 없습니다. 죄를 실컷 범하고서 ‘하나님이여! 오늘도 거짓말하고 왔습니다. 남을 미워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하고 죄를 나열했다고 해서 용서받은 줄 안다면 오해입니다. 애통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애통할 때 죄 사함의 위로를 준다고 했지, 죄를 경홀히 여기는 자에게 죄 사함의 은혜를 준다고 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를 보고 울 줄 아는 사람이 자기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주님의 위로를 강력하게 요구할 수 있는 자입니다.

애통하지 못하는 사람은 봄이 와도 싹이 나지 않고, 여름이 와도 꽃이 피지 않고, 가을이 와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죽은 고목과도 같습니다. 침례 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회개를 촉구하면서 무슨 말을 했습니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3:7~10). 즉 열매 맺지 못하는 죽은 나무처럼 그들의 영혼도 죽었기 때문에 아무리 회개하라고 해도 애통하며 회개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 자, 즉 애통할 수 있는 자라야 살아 있는 봄에 싹이 나는 나무와 같은 자입니다. 죽은 나무처럼 자기 죽음을 보고 울지 않는 자는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지 모릅니다.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히1:4)는 말씀은 그만큼 죄를 안 지으려고 몸부림쳐야 하고,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었다면 그 죗값으로 사망하게 된 내 죽음을 보고 애통하며 울라는 말입니다. 그럴 때 예수께서 그분이 흘리신 피로 위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애통함으로 만나는 하나님의 위로
애통할 때 웃는 사람 봤습니까? 하나님께 덤비듯이 애통하는 사람을 봤습니까? 애통하는 것은 멸망하게 된 자가 최후에 살 길을 찾으려고 몸부림치면서 그 심정을 눈물로 뿜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애통하는 회개를 하지 않았기에 회개하라고 하면 다시 회개한 죄를 끄집어냅니다. 애통하며 주님의 위로 가운데 속죄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흘리신 피 공로에 젖어 회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했으니 우리는 모두 다 기도할 때 애통하고, 주님을 만날 때 애통해야 합니다.

어린 아기는 뜨거운 물건에 손이 데면 다음에는 다시는 그것에 손대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를 보고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아, 내가 이러다가는 지옥 가겠구나!’ 하고 속히 돌이켜야 합니다. 지옥 간 다음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옥에 가기 전에 먼저 고통을 맛보고 죄와 상관하지 않는 진실한 믿음의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40호> 기사입니다.


    아이디 로그인

    아이디 회원가입을 하시겠습니까?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이디/비번 찾기

    소셜 로그인

    연세광장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