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 지상강의 ‘산상수훈’]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
윤석전 목사 지상강의 ‘산상수훈’(12)

등록날짜 [ 2013-06-18 09:54:21 ]

천국이라는 큰 복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큰 사랑이니
육신의 즐거움에 신앙생활의 초점을 맞춰서는 안 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량은 인간이 지닌 지식과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대단히 큽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병든 자를 고쳐 주시려고 채찍에 맞으시고 인간의 모든 질병을 치료해 주셔서 근본적으로 위로해 주셨습니다.

또 저주받는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그 저주를 대신 담당해서 축복이 임하게 하셔서 위로하셨습니다. 죄로 멸망하여 지옥 형벌을 피치 못할 사람에게는 그가 대신 형벌을 담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셔서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 주셔서 위로하셨습니다.

빼앗길 수 없는 위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위로는 값으로 매길 수 없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큰 위로를 받고서도 인격적인 감사의 표현이 없다면 배은망덕한 자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목숨과 재물을 내놓는 이유는 목숨이 끊어질지라도 그분께 위로받은 이것만큼은 놓칠 수 없어서 순교의 각오로 죽도록 충성합니다.

악한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받은 위로를 빼앗아 가려고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그 위로에서 끄집어내서 다시 죄악으로, 저주로, 멸망으로 끌고 가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닙니다(벧전5:8).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이 소중한 위로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시험에 들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에 낙오자가 돼서는 안 됩니다. 구원의 은혜를 등한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히2:3~4).

하나님께 측량할 수 없이 많은 위로를 받았으니 그 위로를 등한히 여긴다면 받을 형벌도 크다는 사실을 알고 위로를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무엇으로 위로받을 것인가
그런데 이렇게 큰 위로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분이 제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 기도해 본 사실이 한 번도 없어요.” 그 이유를 물었더니 하나님께 무슨 염치로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느냐고 오히려 반문합니다. 대단히 믿음이 좋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이 땅에서 부유하게 잘살고 있어서 하나님께 달라고 할 거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자녀는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남편도 안정한 직장에 다니고, 가족이 모두 건강하니까 하나님께 구할 기도 거리가 전혀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겉으로는 예수를 믿고 행복한 사람 같으나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 본 적이 없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자기 영혼이 형벌을 받는 지옥의 뜨거운 맛을 모르는 사람이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피 흘려 죽으신 공로만큼이나 위로받고 구원받을 존재인 줄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구원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신 결과입니다. 그래서 그 무엇보다 구원을 크게 여겨야 합니다. 정말로 어쩌다가 내가 하나님 아들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독생자를 피 흘려 생명을 주시기까지,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 놓기까지 하는 이 큰 위로를 받을 수 있는가 하고 생각할 때 흥분을 억누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위로는 차치하고 출세나 했으면, 우리 자녀가 명문대학에 갔으면 좋겠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표현할 수 없는 위로
요한복음 마지막에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21:25)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인간의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런 찬송도 있지 않습니까?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이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로는 이 지구상에 있는 고상한 단어를 총동원하더라도 절대로 다 표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땅에 속한 것으로 우리를 위로하지 않고 하나님 품속에 있는 독생자로 위로했기 때문입니다.

이 위로는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에 잘 표현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 이렇게 어마어마한 위로를 받은 자라는 사실을 안다면 교회 생활에 불충성할 자가 어디 있으며, 불평불만 하며 반항할 자가 어디 있으며, 불순종할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다”라는 고백은 그저 머슴처럼 순종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먼저 주님이 나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시며 베푸신 위로의 은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이런 큰 은혜를 받았으니 내 생명을 주께 바치며 살겠습니다”라는 의미가 ‘주님 뜻대로 산다’는 고백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큰 위로를 받은 자에게 “당신은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영원토록 내 할 말은 예수의 피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천국에서는 어느 영혼을 붙들고 물어도 “내 할 말은 예수의 피밖에 없습니다”라는 고백만 한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애통하는 자가 됩시다. 그 애통한 분량과는 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4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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