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가 전하는 디모데후서 3장 강해(1)] 끝까지 견디는 믿음으로 이겨내야 할 고통의 때
‘마지막 때는 이러하니’(1)

등록날짜 [ 2013-12-10 09:52:13 ]

마지막 때에 예수 믿는 사람에게 큰 고통이 올 때
다른 것은 다 빼앗겨도 주님만은 절대 잃지 말아야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순교하기 직전에 쓴 마지막 서신서입니다. 에베소교회에서 목회하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목회에 관해 권면하는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더불어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때에 교회 안팎에서 일어날 일들을 소상히 기록해 놓았기에 말세를 만난 오늘날 성도에게도 경계하는 바가 큽니다.

앞으로 디모데후서 3장을 한 절 한 절 자세히 공부하여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에 들림받는 신부로서 자격을 갖추기를 바랍니다.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디모데후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첫 마디는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딤후3:1)입니다.

출애굽기에서도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사막과 같은 광야 생활이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이럴 수가 있습니까? 도대체 왜 우리를 이런 고통 속에 몰아넣으십니까?”라고 수없이 따져 물었습니다(출17:2~3).

그런데 디모데후서 첫 마디에 사용한 ‘고통’은 평소 우리가 말하는 고통의 강도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종말의 때에 환난이 닥치면 어떤 고통을 당하게 될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마24:21). 고통이 얼마나 참혹하면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했겠습니까? 또 요한계시록에도 말세에 당할 무시무시한 고통을 여러 차례 언급합니다(계9장).

마지막 고통의 때에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신랑 되신 주님을 만나 들림 받는 일입니다. 우리가 그런 주님의 신부로서 자격을 갖추려면 표리부동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속과 겉이 같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속 다르고 겉 다른 자를 신부 삼으려 하시겠습니까? 속으로는 세상을 짝하고 흠모하면서도 입으로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는 절대로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주님은 겉이 아니라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으로 이새의 집에 갔습니다. 이새의 아들 중 한 명에게 장차 왕이 될 자라는 징표로 기름 붓기 위해서입니다. 이새가 아들 일곱을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했으나 사무엘은 누구에게도 기름을 붓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심중에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사무엘은 다시 이새에게 물었습니다.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대답했습니다.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한마디로, 밖에 나가서 양치는 못난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는 절대 기름 부음받을 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사무엘이 “그를 데려오라”고 하여 다윗을 보는 순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삼상16:12).

우리도 외식으로 가득한 겉모습으로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중심에 예수가 없으면 겉으로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말로만, 겉으로만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은 하늘에 소망과 꿈이 없습니다. 말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세상과 짝합니다. 한마디로 이중인격자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그분을 사랑하는지, 얼마나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지 중심을 이미 아십니다.

끝까지 견디는 믿음
마지막 때에 예수 믿는 사람에게 큰 고통이 닥쳐옵니다. 즉 환난과 핍박의 시대가 다가옵니다. 아무리 모진 비바람이 불어도 끝까지 가을 작품을 내는 나무처럼, 우리도 신앙의 작품을 내야 합니다. 고통이라는 무서운 태풍이 몰아칠 때 도중에 떨어지는 ‘타크시(taqsh)’(아랍어, 기한 전에 떨어진 열매)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조금만 기분 나쁘고 속상하면 금방 교회 가기 싫고, 조금만 자기 맘에 안 맞아도 신앙생활을 그만두고 싶다면 그 사람은 본래 그 중심에 신앙이 없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기분이나 감정에 따라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반석 틈새로 깊이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심령 안에 믿음이 깊이 뿌리박혀 어떤 핍박과 고통에도 미동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밖에서 아무리 고통이 태풍처럼 불어 나뭇가지가 꺾여도 내년 봄에 그 자리에서 다시 싹을 띄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핍박과 어려움과 고통이 올지라도 내 안에 모신 주님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죽음이 와도 예수를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마24:13). 마지막 때에는 “우상 숭배하라. 짐승의 표를 받으라”(계14:11)고 유혹합니다. 만약 그러지 않고 끝까지 예수를 믿고 복음을 전하는 자는 목을 벤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고통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 믿는 데에 아무런 핍박도 없이 편안한데도 기도와 충성하지 못하고, 순종과 감사하지 못하고, 나태와 게으름을 이기지 못한다면, 그런 자는 말세에, 참혹한 고통이 닥쳐올 때에 하나님을 원망하며 믿음에서 떨어질 것이 뻔합니다.

우리는 말세에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닥쳐올 때, 차라리 복음을 붙들고 순교할지언정 절대로 복음을 배반해서는 안 되며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말세에는 이런 일이 있다고 미리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이 정하신 고통의 때는 반드시 옵니다. 그런 때일수록 우리는 재림의 믿음으로 주님 오실 날을 간절히 기다려야 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6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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