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 지상강의 ‘산상수훈’(21)] 주님의 심정으로 영혼을 섬기라

등록날짜 [ 2013-08-27 11:46:23 ]

신부의 믿음에 이르는 것이 진정한 긍휼이자 사랑
지금은 아파도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바로 가르쳐야

성도를 긍휼로써 사랑하지 않는다면 목회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철저하게 가르칠 필요 없이 적당히 성도가 처한 형편대로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식으로 성도 비위를 맞춰 가며 그저 편안하게만 해 주면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주님의 종으로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성도 아무리 많이 길러 내야 무엇하겠습니까? 그런 성도가 과연 이 땅에서 어떻게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 이길 수 있으며, 세상과 싸워 이기고, 자기 육신의 소욕과 정욕을 이겨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성도 한 명을 양육하더라도 끝까지 싸워 이겨 천국 갈 수 있는, 주님의 신부 자격을 갖춘 금메달감 성도로 키워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목사의 사랑
어렸을 때 제가 다니던 교회 담임목사님은 늘 금메달 성도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제가 목사가 된 후에도 수차례 권면하셨습니다.

“윤 목사! 금메달 성도 만들어야 하네. 나도 목회할 때 금메달 성도 만드느라 사람들에게 인심도 많이 잃었네. 별의별 소리를 다 들었지. 그래도 상관없어. 금메달 성도 만들어야 하네. 마지막 주님 오시는 날 그런 자에게 영광이 있어. 은메달 천 개면 뭐하냐 이 말이여. 금메달 하나가 낫지.”

성도를 주님 맞을 신부의 믿음에 이르기까지 양육하는 목사가 성도를 긍휼히 여기며 사랑하는 목사입니다. 그래서 절대 성도가 죄짓도록 그냥 둘 수 없습니다. 모진 부분은 깎아 내야 하고, 섞인 것은 파헤쳐서 분리해야 하고, 잘못된 것은 지혜롭게 따져서 올바르게 고쳐 놓아야 합니다.

마치 의사가 수술하는 것처럼 영적인 죽음인 죄악을 방관하지 않고 말씀으로 수술하는 일을 맡은 자가 목사입니다.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안 될 응급 환자를 수술대에 올려놓고 칼로 대충 째고 놔두어 죽게 내버려 두는 의사가 어디 있습니까? 당장은 죽을 것처럼 아파도 의사는 수술칼을 들이대서 아픈 부분을 과감히 찢어서 고쳐야 합니다. 수술할 때는 아프지만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서 상처가 아물면 편해지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아픈 자식을 병원까지 데리고 갈 때 부모 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의 몸에 칼을 대는 것을 좋아할 부모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수술해야 낫는다면 과감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베푸는 긍휼
성도에 대한 목회자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은 아플지라도 사랑하기 때문에 과감하게 말씀과 사랑으로 죄를 지적하고 어떻게든 깨닫고 회개하여 신앙생활 잘하기를 소원합니다. 성도 입장에서 야단을 맞을 때는 모진 매를 맞는 것처럼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결국은 그것이 자신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알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면 감사하게 됩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긍휼을 가지고 사랑하는 목사는 성도가 늘 강단에서 선포되는 날 선 예리한 검 같은 말씀으로 몸과 영혼과 골수와 관절까지 찔러 쪼개는 수술을 받아 이 땅에서 영적으로 건강하게 신앙생활 하다가 주님 오시는 그날 영원히 편하게 쉬길 바랍니다.

하지만 이런 사랑 없이 남의 죄를 정죄하기 위해서 보는 것은 긍휼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서 누군가의 죄만 보이거든 긍휼한 마음이 내게 없는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자식들이 죽을죄를 지고 와도 부모 심정이 어떻습니까? 그때 당장은 밉지만 다음 날 아침이면 “이놈아, 밥 많이 먹어”라고 사랑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자식의 허물을 부모가 보지 않듯, 남의 허물을 보지 않고 덮을 수 있는 자가 긍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여전히 죄가 남아 있으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가로막혀서 하나님도 불쌍히 여기실 수는 있으나 긍휼함으로 사랑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시고 우리 죄를 담당시켜 십자가에서 모진 고난과 죽음을 당하게 하시고 죄 문제를 해결하셨기에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실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도 만약 죄만 본다면 그 자식이 미워서 사랑하지 못합니다. 죄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습니다.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
이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의 죄를 기억하고 있으면 사랑하지 못합니다. 죄를 기억하지 않고 망각할 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죄는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원수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벧전4:8). 그런데도 만약 우리가 상대방의 허물을 본다면 주님도 우리 허물을 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에는 상대방의 허물을 네가 본다면 나도 네 허물을 보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주기도문 내용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네가 남의 죄를 본다면 나도 네 허물을 보겠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아무리 주님께 허물을 보이지 않으려 해도 내가 허물이 없어서 안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주홍같이 붉은 죄와 허물이 있다 해도 주님이 대신 그 죄를 담당하셨기에 간과하실 뿐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은 상대방의 죄와 허물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다만 그 허물로 말미암아 죽게 된 영혼의 처지가 안타까워 기도할 뿐입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5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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