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 지상강의 ‘산상수훈’] 아버지의 애타는 심정을 아는 자녀가 되라
윤석전 목사 지상강의 ‘산상수훈’(29)

등록날짜 [ 2013-10-29 10:38:23 ]

하나님과 화목하려면 먼저 죄 사함부터 받아야
그리스도인은 ‘화평케 하는 직책’ 부여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상수훈 때 말씀하신 바대로 ‘화평케 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는 복’을 받으려면 사람과 사람 사이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평케 해 주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가 이웃을 하나님과 화평하게 해 주지 않으면 결국 그 자신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자격을 잃고 맙니다. 이웃을 하나님과 화평하게 해 주지 않는다면, 그가 아무리 하나님을 불러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을 수 없는 처지가 됐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하나님과 화평을 이뤘다면 그다음 순서는 어떻게 해서든 가족, 친지, 이웃을 전도하여 그들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도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신 죄 사함의 은총을 받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복된 자녀가 되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도 지옥의 멸망에서 건짐받은 자가 되게 해 주어야 합니다. 목사가 주일마다 하나님 말씀을 강력히 선포하여 성도들이 통회자복 하며 기도하게 하는 일도 결국 성도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일주일간 하나님과 불목한 죄악을 회개한 성도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자격을 갖추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먼저 믿은 자, 믿음이 강한 자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었다고 말했습니다(고후5:18~19).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권리
그런데 남을 화평케 하기는커녕, 자기 신앙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으로 볼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면, 이는 교리적.종교적인 차원일 뿐, 진정으로 아들의 자격을 갖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에 다녀도 억지로 끌려 다닙니다. 그래서 교회 오면 늘 피곤합니다.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하니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교회에 와 봐도 별 것 없네” 하며 불평불만 합니다. 교회에 와서 떼돈을 벌어야 별것 있는 것입니까?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과 화평하고, 또 남도 하나님과 화평케 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면 이보다 행복하고 위대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권세는 대단합니다.

여자들도 자기를 ‘하나님의 딸’로 여기지 마십시오. 천국에서는 천사처럼 남녀 구별이 없습니다. 모두 복음의 씨로 낳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육신으로 볼 때는 여자에게는 ‘씨’가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으로는 여자들도 얼마든지 전도하여 믿음의 자녀를 낳아 복음의 씨를 퍼트릴 수 있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입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똑같은 복음의 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썩지 아니할 씨로 거듭났다고 했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1:22).

아들만 할 수 있는 일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씨를 뿌려 하나님과 이웃을 화평케 하는 전도를 가장 기뻐하십니다. 주님께서도 자신이 이 땅에 전도하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1:38). 우리가 하나님 자녀라면 당연히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도록 전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는 누구도 이 일을 담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만이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형벌받을 인간을 살려 내고 싶은 아버지의 뜻과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이처럼 인간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뜻과 심정을 잘 알기에 철저히 자신을 아버지께 맞추려고 했습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라는 중대사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이런 기도를 드린 주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이 쓴잔을 피해서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느니 차라리 내가 죽을지라도 아버지와 화목하기를 원합니다’ 하는 심정이 아니었을까요. 예수께서도 육신을 입으셨기에 십자가에 못 박혀 잔인한 고통을 당하는 죽음을 피하고 싶으셨지만, 아버지의 소망이 자기가 죽어 인류가 생명을 얻는 것이니 아버지 원대로 기꺼이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불목하는 일이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어 인류를 구원하는 중대사를 앞두고, 만약 자신이 이 일을 잘못 진행해서 아버지의 심기를 상하게 해드리느니 차라리 자신이 죽어 그 일을 기꺼이 수행하겠다는 기도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을 자도 하나님의 심정과 뜻을 잘 아는 자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외면할 수 없어 죽기까지 거역할 수 없는 자를 말합니다. 이런 자에게 화목케 하는 일을 맡기십니다.

아버지 심정으로 하는 전도
그런데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심정을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습니까? 아들을 죽여서라도 인류가 구원받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애끓는 심정을 제대로 헤아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심정을 내가 알고 지녔다면 죽어가는 뭇 이웃을 구원하기 위하여 나는 죽을지라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구령의 열정이 끓어올라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냐 아니냐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알고 그 뜻대로 순종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기 원한다면 예수와 동일한 구령의 열정을 지니고 멸망하는 이웃 영혼을 전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이 부른다고 무조건 따라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말고 멸망하는 영혼을 살리려 애끓는 아버지의 심정과 소망을 알고 가지고 그분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화평케 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자입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5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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