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가 전하는 디모데후서 3장 강해(4)] 자기 육신만 만족하면 그만인 시대
‘마지막 때는 이러하니’(4)

등록날짜 [ 2013-12-31 10:16:30 ]

정욕의 욕구 충족만을 생각하며 영혼 사랑하는 마음 식어
예수 그리스도처럼 내가 죽고 이웃 살리려는 각오 있어야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딤후3:1~2).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 말을 할 당시나 이천 년이 지난 지금이나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 혹은 자기가 맡은 본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는 결국 자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말세에는 사람들이 육신만을 집착해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육신만 사랑하고 진정한 자기 자신인 영혼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어 만든 영적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는 데서 나온 행동입니다(창2:7).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영혼을 죄와 저주와 지옥 형벌에서 건져 주시려는 사랑의 뜻을 이루시려고 자기 아들이라도 아낌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피 흘려 죽으심으로 성취하신 인류 영혼 사랑을 땅끝까지 전파하도록 자기 제자들이라도 아낌없이 순교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초대교회 교인과 수많은 믿음의 선배는 그 순교의 행로를 묵묵히 걸어 인류 영혼 사랑의 발자취를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이어주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위로 주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 영혼을 사랑하는 일에 자기 생애를 장렬하게 불태웠습니다. 그런데 말세가 되면 이처럼 영원히 사는 영혼은 사랑하지 않고, 팔십 년도 제대로 못 살 썩어질 육신만 사랑하기에 바쁘다는 것입니다.

자기 육체만 사랑한다
마지막 때에는 복음을 전파하여 영혼을 살리는 일은 뒷전입니다. 그저 ‘돈이 하나님’이라는 물질만능주의 사고에 사로잡혀 돈 붙잡고 앉아 먹고, 입고, 쓰며 육신을 보전하는 데에만 전력합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본문 말씀이 그대로 적중하는 현실이 그저 두렵기만 합니다.

사람들은 발전한 첨단 기술로 육신을 보호하고 가꾸며 사랑하는 데에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어떻게 하든 육신을 편안하게 하려는 방향으로만 모든 문명이 발전하는 양상입니다. 또 요즘 우리나라 가정에 문제가 많고, 특히 이혼율이 높은 이유도 자기만 사랑하는 이기주의 때문입니다. 부모도, 배우자도, 자식도 자기를 위해 있다고 오해하는 극단적 이기주의, 즉 자기 사랑 때문에 가정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이 세상은 자기 육체를 사랑하는 데에 극도로 치우칩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세에는 자기를 사랑하며…’라고 한 말은, 한마디로 자기 육신을 위하여 모든 것을 투자한다는 뜻입니다. 원래 ‘사랑’하면 아끼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아무것도 남김없이 다 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말세에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은 자기 영혼을 사랑하는 데는 전혀 쓰지 않고 오직 육신을 사랑하는 데에 아낌없이 쓴다는 뜻입니다. 만약 당신이 충성하는 일보다, 기도하는 일보다, 전도하는 일보다, 그 어떤 주님의 뜻대로 사는 일보다 자기 육신을 더 사랑하거든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아, 말세에 내가 육신을 사랑하는 덫에 걸렸구나.’ 그렇다면 영혼 사랑으로 행보를 재빨리 돌려야 합니다.

로마서 8장 13절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정신 차려서 이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이제 육신을 사랑할 것이 아니라 주님과 내 영혼을 사랑하는 데에 인생을 값지게 써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는 말은 “네 목숨이 끝날 때까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말세에는 아무리 애타게 일러주어도 이 말씀처럼 사랑하는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도, 자기 영혼도, 이웃 영혼도, 누구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웃 사랑이 식는다
‘영적생활’을 하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만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영적생활의 가장 큰 작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 자기 몸 버려 피 흘려 주신 희생입니다. 우리도 이웃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이처럼 희생해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사랑입니다.

하지만 믿노라 하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작은 일조차 남을 배려하지 않는 모습을 대할 때면 안타깝다 못해 불쌍하기까지 합니다. 일례로, 어떤 사람은 예배시간에 장의자 한쪽 끝에 앉아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합니다. 다른 사람이 불편한 자세로 자기 앞을 지나가는데도 그냥 앉아 있습니다. 때로는 그렇게 좁은 틈으로 지나가려는 사람을 탐탁잖은 표정을 지으면서 째려보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사랑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습니다. 남이야 어찌 되든 자기만 신앙생활 잘하면 그만이라는 식입니다.

성경은 철저히 타인을 배려하고 섬기고 희생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죄로 지옥 형벌을 받을 내가 예수의 피 공로로 구원받은 다음부터는 나도 목숨을 내놓고 그를 구원하려는 예수의 정신과 사랑을 철저히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고 실천하여 베풀지 않으면 이는 영적으로 갓난아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갓난아이는 제 배고프면 엄마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 데서나 보채고 웁니다.

어릴 때 제 아우가 어머니 젖을 먹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우가 젖을 세차게 빨아 당기면 어머니는 아파서 어쩔 줄 몰라 합니다. 그저 하늘을 쳐다보며 고통스러워합니다. 아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젖을 먹습니다. 엄마야 젖이 아프든 말든 그저 제 배 부르면 그만입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면 아우가 얼마나 얄미운지 모릅니다.

교회에서도 영적으로 갓난아이인 사람은 자기밖에 모릅니다. 상대를 배려할 줄 모릅니다. 신앙생활도 이처럼 사랑 없이 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말세에는 이렇게 사랑이 결핍된 상황이 반드시 닥쳐온다는 것입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6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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