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가 전하는 디모데후서 3장 강해(20)]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치 못하는 시대
‘마지막 때는 이러하니’(20)

등록날짜 [ 2014-04-29 10:05:54 ]

표현할 수 없는 큰 사랑을 알지 못하기에 오는 문제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원망과 저주만 가득해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딤후3:2).

사도 바울은 말세를 당하면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까마득히 망각하고 감사치 아니한다고 경고하였습니다. 죄를 지어 멸망하게 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놀라운 사랑은 인간의 지식으로는 감히 측량할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한낱 피조물인 인간을 살리시려고 아들을 죽인 그 사랑을 인간의 언어로 다 표현할 길이 없기에 우리는 각자 자신이 깨닫는 대로만, 체험한 대로만 단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감격할 뿐입니다.

말세에 인류에게 닥치는 수많은 문제와 갈등은 먼저 위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데서 비롯됐습니다. 창조주께서 왜 천지만물을 지으셔서 인간에게 주셨는지, 인간이 죄로 멸망하게 되었을 때 왜 아들을 희생 제물로 삼아야 했는지, 그분은 그 큰 은혜를 입은 인간에게 어떤 영광을 받기 원하시는지 전혀 모르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채 교만하여 오히려 그분의 말씀을 훼방하고 거역하며 살아갑니다.

특히 말세가 되면 하나님 말씀에 대한 거역과 훼방과 불순종이 극에 다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독생자를 죽이기까지 인간의 죄를 사해 죄에서, 저주에서, 질병에서, 지옥 멸망에서 구원하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할 줄 모릅니다. 오히려 그 은혜에 배은망덕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감사를 표현치 않는 시대
요즘 한국교회만 보아도 성도들의 신앙생활 태도가 초대교회 때 성도들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자기주의가 강하고 이기적입니다. 그렇게 멀리가지 않더라도 제가 어릴 때인 1950~1960년대 성도들의 신앙생활 모습과 비교해 보아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이기적이고 정욕적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성도 개개인의 필요를 채워주고 정욕의 욕구를 들어주려고 존재하는 분으로 오해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한 개인의 필요에 따라 존재한다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용하려고만 합니다. 이런 모든 악한 행위가 어디서 옵니까? 감사치 않아서 그렇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오늘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앙생활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많은 유대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이유를 유대인의 종교를 반역하고 신성을 모독한 죄로 말미암은 것으로 알았으니, 그들을 설득해 너희가 죽인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너희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죄 없으신 분이 대신 십자가를 짊어지셨다고 전도하려면 지금보다 전도하기가 얼마나 더 어려웠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이는 살벌한 예루살렘 거리에 나가 성령에 이끌려 과감하게 예수를 구세주라 전하고, 또 자기 전 재산을 바쳐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목숨 걸고 전도하며 감사를 표현하는 성도들을 별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이론이나 지식으로 알 뿐, 실제 체험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마지막 때에 감사치 못하는 원인은 한마디로 감사할 만한 은혜 받은 체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감사를 망각한 성도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교회에서 목사와 성도는 유대관계가 참 끈끈했습니다. 목사의 권위는 실로 대단했습니다. 어느 날 우리 목사님께서 광고하시기를, “우리가 금년에 지교회를 세웠으니 저쪽 동네 사시는 분들은 지교회로 가시고, 이쪽 동네 사시는 분들은 본교회로 오십시오”라고 하시자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길 건너에 사는 분은 모두 지교회로 갔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성전에서 새신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수차례 광고해도 제대로 듣지 않습니다. 의자 한가운데부터 앉아서 드나드는 사람이 불편하지 않게 하라고 해도 따르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목사의 말이든 예배위원의 말이든 예배 질서를 잡으려고 하는 이런 말에 순종하지 않는 이유도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감사도 없고 순종도 없는 때입니다.

요즘은 한 교회에서 평생 목회하며 자기 인생을 바친 분이 나이 들어 쫓겨나는 일도 있습니다. 누구의 도움으로 은혜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까? 바로 그 목회자의 충성과 수고로 말미암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이런 배은망덕한 일이 일어날까요? 은혜 받은 데 대해 감사를 모르고 고마움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감사를 망각했기에 원망과 저주가 나옵니다. 이것은 분명한 마귀역사입니다.

감사가 없는 시대
마귀는 제일 먼저 하나님과 관계에서 감사를 무디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꿔 버립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지금이 바로 그런 때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타락했느냐 안 했느냐는 내게 감사가 있느냐 없느냐로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자식들이 부모의 은혜를 감사히 여깁니까? 제자들이 선생님의 은혜를 감사히 여깁니까? 감사가 없는 시대는 그만큼 사람의 심령이 메말라 있어서 메마른 땅이 갈라지듯이 갈라집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가 그렇게 갈라지듯 갈라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가 갈라지고, 부모와 자식 사이도 갈라지고, 은혜 베푼 자와 은혜 입은 자가 그렇게 갈라집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8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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