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가 전하는 디모데후서 3장 강해(24)] 성령 충만으로 육신의 소욕을 이겨야
‘마지막 때는 이러하니’(24)

등록날짜 [ 2014-05-28 09:27:29 ]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심각한 죄가 난무해
회개하지 않는 시대, 죄책감마저 점점 없어져 가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3:1~2).

마지막 때는 믿노라 하는 사람들조차 거룩하신 성령 하나님께서 감화감동하시는 대로 살려 하지 아니하고 육신의 생각에서 나오는 욕구 충족을 좇아 살려 하기 때문에 거룩하지 아니하다고 말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에도 육신의 생각대로 사는 사람들은 하늘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무섭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육체의 일은 현저하다’는 말은 ‘성령의 생각이 아닌 육신의 생각에 지배받는 사람들이 하는 일은 확연히 구별된다,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육신의 일은 거룩하지 못한 것이 확연하고 뚜렷이 구별되니 그런 육체의 일에서 분명히 돌아서라는 말입니다. 육신은 거룩할 수 없으니 육신을 가지고는 천국에 절대 못 갑니다.

성적인 타락은 심해지고
사도 바울은 ‘육체의 현저한 일’ 중에서 제일 먼저 ‘음행’을 언급하였습니다. 성적 타락으로 말미암은 죄는 사람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큰 죄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성적 타락이 만연해 있습니다. 그다음이 물욕에서 오는 타락이요. 셋째가 명예욕에서 오는 타락입니다.

육체의 생각으로 사는 사람은 성욕, 물욕, 명예욕에 이끌려 도무지 거룩함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강간사건이 일어나면 신문에 크게 보도되고 경찰서가 들썩들썩했습니다. 범인에게는 최하 수년 징역형을 내려 사회를 어지럽힌 강력범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말세가 될수록 성적인 타락에서 오는 범죄가 자주 일어나 이제 강간쯤은 뉴스거리로 취급하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요즘 젊은이들은 성적 타락을 그저 재미있는 오락 정도로 가볍게 여깁니다. 자신의 순결을 깨뜨려 잔인하게 짓밟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처럼 이 시대는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것을 부정한 줄 모르고, 더러운 것을 더러운 줄 모르고 사는 참으로 거룩하지 못한 때입니다.

성경에 간음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말했습니다(신22:13~21;요8:5). 간음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큰 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가던 중 모압 평야에 있는 싯딤이라는 지역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 중 일부가 그곳 모압 여인과 음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였고 그 결과 간음한 자 이만삼천여 명이 하루에 죽임을 당했습니다(민25:1~9).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10:8~11).

이처럼 율법시대에는 음행하는 자, 간음하는 자에게는 용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복음시대에 와서는 예전에 비해 성적으로 엄청나게 타락했으면서도 그 심각성을 모릅니다. 자기를 순결하게 지켜야 할 젊은 남녀가 자신의 정조를 헤프게 여겨 순결을 파괴하고서도 회개하지 않고 거룩한 체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몹시 안타깝습니다.

성령으로 육신의 소욕을 이겨야
사도 바울은 육체의 일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에 앞서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육신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내 영혼의 본능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거룩하게 살고 싶은데 육신의 소욕이 내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육신의 소욕은 끝내 나를 거룩하지 못한 자로 만들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소욕을 이기는 유일한 비결은 성령의 소욕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말세에 성령 충만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해서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은 육신의 생각으로 사는 사람과 달라서 벌써 행동도 다르고, 나타나는 능력도 다르고, 삶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이 땅에 소망이 없고 하늘 소망이 가득하다 보니 육신의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사는 푼수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내에서도 인본주의에 물든 사람들이 성령 충만한 사람들을 자기들과 다르다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저는 어렸을 때부터 성령 충만한 교회에서 성장했기에 성령 충만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에 아주 큰 문제가 온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육신의 소욕대로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면 항상 더러운 죄만 끌어들인다는 점을 잘 알았습니다. 그와 반대로 성령이 충만하면 보는 것도 거룩하고, 말하는 것도 거룩하고, 듣는 것도 거룩하고, 생각하는 것도 거룩하다는 점을 알기에 성령 충만하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성령 충만만이 육신의 소욕을 이기고 거룩함을 내 안에 이루고 유지하는 유일한 비결이라는 사실을 알고 성령 충만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8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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