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가 전하는 디모데후서 3장 강해(25)]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거룩함에 이르라
‘마지막 때는 이러하니’(25)

등록날짜 [ 2014-06-11 10:40:40 ]

영적인 절차를 우선시하지 않는 것이 육체의 소욕
눈에 보이는 세상을 좇아가면 영생에 이를 수 없어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 보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려 이 둘이 대적함으로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기에 성령 충만으로만 육신의 소욕과 정욕을 이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16절에는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육체의 욕심’이 무엇입니까? 육신의 소욕입니다.

영생을 우선하지 않는 것이 욕심
사람들이 말하는 ‘욕심’이란 분수에 지나치게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욕심이란 무엇일까요? 누가복음 12장 13~15절에 어떤 사람이 예수를 찾아와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누게 하소서”라고 부탁합니다.

부모가 물려준 재산을 형이 다 차지해서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나누게 해 달라고 예수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라고 하시면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탐심’은 욕심을 말합니다.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형에게서 나누어 갖는 일을 주님께서는 탐심, 욕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형에게서 자신의 분깃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을 욕심이라고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주님 보시기에 욕심이란 생명을 우선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생명을 주러 오신 분이기에 예수께 왔다면 무엇보다 생명을 제일 먼저 구하길 원하신 것입니다. 유산을 나누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생명을 우선했어야 합니다. 이처럼 영적인 것을 우선하지 않고 육신의 것을 우선하는 것이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권리고 옳고 똑똑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욕심이라는 말입니다.

곧 이어서 소출이 풍성한 한 부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부자는 쌓아 둘 곳이 없을 만큼 농사가 잘되어 지금 있는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겠노라고 합니다. 이렇게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이제 자기 영혼도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께서 오늘 밤 그 영혼을 도로 찾으시면 그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물으시면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의 비유에서도 영적인 절차를 우선하지 아니하고 육적인 절차를 우선하는 것이 탐심이요, 욕심이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8장 12~14절에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육신의 요구대로 사는 육의 사람은 죽고 영적인 요구대로 사는 사람은 산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요구보다 영의 요구를 우선하라는 말입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 거룩한 삶인데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거룩하게 살려고 하면 육신은 언제나 육신의 것을 우선하자고 나옵니다. 거룩함이 상실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신 것은 우리 육신으로는 거룩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육신으로는 거룩함에 이를 수 없어
창세기 6장 5~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면서 지면에서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쓸어버리기로 작정하셨고 대 홍수를 내려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8장 21절에서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쓸어버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악한 생각을 가져오기 때문에 육체의 소욕을 그대로 두고는 인간을 절대 거룩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육신이 있는 한 인간의 방법으로는 인간 스스로 거룩할 수가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거룩함
그렇다면 이제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한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대신 피 흘려 죽으셔서 그 죄를 사하시고 성령을 보내서 그 성령으로 압도당하게 만들어 거룩하지 못한 육신의 생각은 죽이고 성령의 역사만 나타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로 죄 사함받아 성령이 충만한 자에게서는 ‘성령의 열매’라는 성령의 성품이 나타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열매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은 금지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거룩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말세에 사람들이 거룩하지 않다는 말은 성령 충만한 역사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보다 육으로 사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말세가 되면 될수록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8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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