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가 전하는 디모데후서 3장 강해(34)] 지혜롭게 절제하여 믿음에서 승리하라
‘마지막 때는 이러하니’(34)

등록날짜 [ 2014-08-11 00:47:28 ]

육신은 잘못된 일인 줄 알면서도 제동을 걸지 못해
오직 성령 충만으로만 모든 욕심을 제거할 수 있어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때에 당할 일을 경고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로 17절에 그러한 경고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번 호부터는 그중에서도 “절제하지 못하며”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말세를 어떻게 대처할지 알아봅시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다가 ‘이 일을 해서는 안 되겠다’라고 확정하면 당장 그 일을 그만둘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이 하는 일이 옳은지 그른지 전혀 판단하지 못할 때입니다. 잘못된 일을 옳은 일인 줄 알고 열심히 하는 사람은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와 같습니다. 신앙생활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잘못된 일을 할 때 누군가가 내 안에서 브레이크를 걸어 주고, 좋은 일은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가속도를 낼 수 있게 분별해 주지 않으면, 주님 앞에 서는 날 심판을 피치 못합니다.

음부에서 고통당하는 부자처럼, 자기가 하나님 앞에 바로 살아온 줄 알았다가 음부의 불구덩이 속에 떨어져서야 비로소 잘못 살았다고 깨닫고 피눈물을 흘려도 이미 때는 늦습니다.

제한 받지 말아야 할 신앙생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말씀으로 옳고 그름을 선명히 분별하게 해 주시고, 성령이 우리 안에서 감화 감동함으로써 확실하게 우리를 하나님 말씀을 좇아 살도록 인도해 주신다면, 모든 일에 완급이 조절되어 신앙생활에 성공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세상적 생각을 타고 들어오는 불신앙을 막을 수 있어야 하는데, 종종 세상 것을 여과 없이 받아들여 물의를 일으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도 “다른 복음을 너무 잘 용납한다”며 책망했습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11:4).

오늘날에도 한 때 교회에서 열심히 충성하던 사람이 언젠가부터 주의 일에서 손을 떼고 예배에만 참석하고는 집으로 가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예전처럼 열정적으로 충성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주의 일을 하다가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다 보니 이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자기 신앙 하나만 잘 지키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과 하나 되어야 하는 교회 공동체 생활에서 자기 성질을 절제하지 못해 충성에서 낙오한 경우입니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다른 것은 다 좌절되어도 주를 향한 사랑과 충성은 절대로 좌절되어서는 안 됩니다.

평신도 집사 시절, 복음으로 낳다시피 하여 아주 가깝게 지내던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유명 연예인도 여럿 있었습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몸이 아파서 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온 후 그들과 연락을 끊었고 심지어 교회 개척할 때도 그들에게 일절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오랜 후에 다시 그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를 붙잡고는 왜 그렇게 갑자기 자기들과 소식을 끊었는지, 또 교회를 개척했으면서도 왜 초청장도 보내지 않았냐며 얼마나 서운해하는지 모릅니다. 당시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을 자세히 말해 주어서 오해를 풀어 주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아마 당시 그분들에게 제가 교회를 개척한다고 말했으면, 그들과 함께 정말 훨씬 좋은 환경 속에서 교회를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아마도 연예인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교회를 멋지게 지어서 개척했으니 성전을 지어야 한다는 아쉬움도 없었을 것이고, 그들이 헌금도 풍족하게 했을 것이니 재정적으로도 어려움이 없었을 터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아쉬움이 있어 20여 년간 죽기 살기로 매일철야 하며 기도했겠습니까? 아마 그때 저는 하나님 앞에서 고의적으로 고통에 들어갔는지 모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 왜 저인들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해서 와 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솔직히 그런 마음이 들었지만 모두 절제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아마 교회 개척한다고 한마디만 했으면, 적어도 연희동 성전 시절 보증금을 낀 사글세 신세는 금세 면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려움에 들어가 무릎 꿇고 지금까지 지나온 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아하, 그때 허황한 꿈을 버렸기에, 그때 기도할 수밖에 없는 조건으로 스스로 만들어 갔기에 오늘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고 어려움을 억지로 만들라는 말은 아닙니다. 저는 저 자신을 그만큼 알았다는 말이요, 그만큼 절제했다는 말입니다. 내가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될 사람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알았습니다. 그것이 다 하나님이 도우시려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면에서 인간적인 방법을 절제하고 하나님이 일하실 방법을 선택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최악의 경우를 만날 그때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선의 기회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만 보라보며 절제하라
아담이 마귀의 말을 듣고 미혹되자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심을 절제하지 못해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하신 선악과를 먹은 죄로 인류를 멸망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삼손이 육신의 정욕을 절제하지 못해서 자신의 힘의 근원을 들릴라에게 발설하여 블레셋 군에 두 눈이 뽑히고 말았습니다.

또 아간이 물욕을 절제하지 못해서 전쟁에서 얻은 물건을 도둑질하는 바람에 아이 성 전투에서 수많은 군사가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절제할 수 없고 오직 성령만이 하실 수 있기에 성령의 열매 속에 ‘절제’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도 절제하고, 내 속에서 나오는 혈기도 절제하고, 행동도 절제하고, 나의 혀도 절제하여 묶어 놓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사랑하시고 인류 구원의 아버지 뜻을 이루시려고 절제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것은 넘치는 것도, 모자라도 것도 전부 정리하고 알곡 딱 붙들고 이것만은 뺏기지 않는 절제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9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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