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가 전하는 디모데후서 3장 강해(53)] 세상 쾌락은 하나님 말씀의 씨를 결실치 못하게 해
‘마지막 때는 이러하니’(53)

등록날짜 [ 2015-01-01 00:14:34 ]

참다운 낙은 영원히 변치 않는 영원한 나라에서 얻는 것
그리스도인은 향락을 좇게 만드는 정욕을 반드시 이겨야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에서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말세에는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다”며 육신의 정욕을 좇는 쾌락에 대해 엄중히 경계했습니다.

‘쾌락’이란 기분이 대단히 좋고 즐거운 느낌, 또는 감성 만족과 욕망 충족에서 오는 유쾌하고 즐거운 감정을 뜻합니다. 쾌락은 육체의 만족,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유쾌한 감정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말세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쾌락을 더 추구하는 시대가 온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이구동성으로 말세지말이라고 하는 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즐거워해야지 육체적 쾌락을 좇다가는 육신의 정욕을 통해 인간에게 역사하는 마귀의 궤계에 빠져 어느 순간 자신의 영혼이 망할지 모릅니다.

세상 쾌락보다 영적인 기쁨을
욥기서에는 쾌락의 최후가 ‘음부’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그 날을 형통하게 지내다가 경각간에 음부에 내려가느니라”(욥2:12-13).

이처럼 성경은 세상 쾌락이 결국 자기 영혼을 음부에 내던지는 지름길이라는 영적 지식을 우리에게 확실히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어찌 자기 영혼을 멸망에 빠트리는 육신의 쾌락을 좇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어느 부자가 풍성한 소출로 황금 물결치는 가을 들판을 바라보고 기뻐하는 속내를 여실히 들여다보고 바로 뒤이어 그 영혼에게 닥칠 멸망의 현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16~21).

한마디로 이 부자는 영적인 기쁨보다 육신의 쾌락을 우선하여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참으로 허무하고 미련한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이 부자와 같이 육신의 욕구와 쾌락을 좇아 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죄 사함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조차 세상 유혹에 빠져 자기 영혼의 만족과 즐거움을 위해 이 땅에서 잠시 받는 환란과 핍박을 기쁨으로 감당하기보다는 세상의 육신적 쾌락, 물질이 주는 즐거움을 우선합니다.

세상 것, 육신의 것을 우선하고 그것들로 즐거우면 자신이 하나님께 복 받은 줄 오해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는 비록 망했다 할지라도, 우리 속에 세상 것보다 영원히 큰 가치가 있다는 점을 알고 영원한 것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가치 있는 즐거움
이사야서 22장 12~13절에도 육신의 쾌락, 세상 즐거움을 찾는 자가 쾌락 만능주의로 사는 대책 없는 모습에 대한 안타까움을 여실히 표현해 놓았습니다.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하사 통곡하며 애호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도다.”

하나님께서 회개하여 살라고 살길을 알려 주셨는데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일 죽을지라도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어리석다 못해 비참한 몰골입니다.

우리는 먹고 즐기는 쾌락을 좇는 행위의 최후가 죽음이요 음부라는 영적 현실을 직시하고, 단 한 사람도 세상에 물들지 말고, 육신의 쾌락을 멀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영혼의 때를 보장하는, 영적 유익과 가치를 좇아야 합니다.

세상 향락과 쾌락은 ‘가치 있는 즐거움’, 즉 하나님 말씀이 내 심령에 이루어져 열매 맺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이래서는 안 되지’라고 뉘우쳐도 육신의 향락과 쾌락에 넘어가면 여태 들은 하나님 말씀들이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같이 결실을 내지 못합니다.

오히려 향락과 쾌락이라는 가시덤불이 심령을 덮어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이 결실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향락과 쾌락은 ‘내가 언제 예수를 믿었나?’ 할 정도로 육신대로 살던 과거로 자신을 돌려 놓습니다.

‘나도 한때는 생명의 말씀을 들어 봤어’라는 미련만 있을 뿐,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고 향락과 쾌락, 육신의 욕구 충족이라는 거센 파도에 떠밀려 자기 영혼을 급히 멸망으로 몰아넣습니다.

말씀을 결실치 못하게 하는 쾌락
누가복음 8장에, 농부가 애써 씨를 뿌려도 결실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씨앗이 가시떨기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도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라고 했습니다(눅8:14).

하나님 말씀의 씨가 내 안에서 결실치 못하는 원인은 첫째 세상 염려요, 둘째 재리(財利), 즉 재물을 지나치게 열망하는 것이며, 셋째 일락(一樂), 즉 생의 향락입니다.

세상 것으로 향락을 즐기려는 사람은 절대 하나님 말씀이 심령 안에서 열매 맺지 못합니다. 육신의 정욕은 하나님 말씀이 내 안에서 열매 맺지 못하게 하는 원수이니 우리는 무엇보다 정욕을 이겨야 합니다.

이 세상 낙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주시는 평안의 낙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세상 것으로 낙을 삼는다면 말씀은 내 안에서 결실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나의 참다운 낙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낙을 찾으려 한다면 그 말씀은 절대 결실하지 못합니다. 내가 들은 하나님 말씀의 씨가 나에게서 꼭 결실을 맺도록 어떤 세상의 즐거움이라 할지라도 내 안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41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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