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가 전하는 디모데후서 3장 강해(54)] 육신의 쾌락을 좇으려는 근성을 버리라
‘마지막 때는 이러하니’(54)

등록날짜 [ 2015-01-06 23:20:47 ]

어떤 육적인 향락도 내 믿음을 사로잡지 못하도록 지켜
언제나 영혼이 즐겁고 기쁨이 충만하도록 항상 기도해야

디모데후서 3장 4절을 보면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고 했습니다. 지난 호에 이어 성경은 쾌락을 추구하는 자를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좀 더 알아 보고자 합니다.

살았다고 하나 실상은 죽은 자
성경은 믿노라 하면서 천국, 구원, 죄 사함보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보다 세상 향락과 쾌락을 더 사랑하는 사람을 일컬어 ‘살았으나 죽은 자’라고 말합니다.

디모데전서 5장 5~6절을 살펴봅시다.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과부는 혼자 지내니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그러다보니 주님을 남편 삼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주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신앙생활에 더욱 전념합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그런 자신의 처지를 신령한 기회로 삼지 않고, 세상 즐거움에 빠져 일락(一樂)의 기회로 삼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다고 했습니다.

즉, 육신은 살았으나 영혼은 죽었다는 말입니다. 비단 과부뿐만 아니라 일락을 즐기는 자에게 내리는 성경의 진단은 명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쾌락에서 떠나기로 작정해야 합니다. 육신은 ‘살았으나 실상 자기 영혼은 죽은’, 저주스러운 세상 낙을 기뻐하고 좋아하는 사람과 영적으로 철든 사람과는 상대가 안 될 정도로 극과 극입니다.

행락에 종노릇 하지 말라
디도서 3장 3~5절에도 쾌락을 경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3절에 ‘행락(行樂)에 종노릇’ 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 역시 쾌락이나 향락에 사로잡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영육 간에 죽을 것을 모르고 그저 육신의 욕구 충족을 좇아 낙을 누리려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사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으로 새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은혜를 입은 자로서 감사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쾌락을 등져야 합니다.

야고보서 5장에서도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약5:1)고 했습니다. 이 말은 “부를 자기 사치와 향락에 사용한 자들아 들어라 이제 울고 통곡할 날이 온다”는 뜻입니다.

또 5절에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자기 부유로 사치하고 연락하는 자는 도살할 자가 짐승을 죽이려고 작정하고 피둥피둥 살이 찔 때까지 기다리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이보다 더 저주스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육신의 쾌락을 포기하라
히브리서 11장에는 세상 부귀영화를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을 함께한 모세의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날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재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

모세는 육신의 쾌락으로 죄악을 날을 누리기보다 고난의 길을 더 좋아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자기에게 자유와 부유를 누릴 권한, 대접받을 권한이 있지만 그런 권한을 쓰지 않고 포기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육신의 즐거움보다 하나님의 일이 아름답게 이루어지기를 바랐습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찌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고전9:4~15).

우리도 세상의 육적인 향락이 내 믿음을 사로잡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육신의 쾌락을 좇으려는 육신의 소욕을 철저하게 몰아내고 영혼을 즐겁게 하는 영적인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41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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