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가 전하는 디모데후서 3장 강해(66)] 더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방해를 이겨야
‘마지막 때는 이러하니’(66)

등록날짜 [ 2015-04-07 12:59:44 ]

하나님의 역사와 악한 영의 역사 구별할 줄 알아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영적생활만큼은 끝까지 지켜야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그러나 저희가 더 나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니라.”

디모데후서 3장 8~9절을 살펴보면, 거짓은 사람을 한두 번은 속일 수 있지만, 결국 그 본질이 드러나므로 더는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려 줍니다.

가증된 행동
어떤 사람은 저를 만나면 “제가 목사님을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럴 경우에 대개 저는 그를 경계합니다. 속으로는 불의를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교언영색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그 속까지 훤히 들여다보이기도 합니다. 진짜로 저를 사랑하여 기도해 주는 사람은 말로 떠벌리지 않습니다. 그래도 사랑하는 진심이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행동을 보면 진심인지 아닌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뒤로는 헐뜯고 욕하고 갖은 못된 짓을 다하고 술수 부리면서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면 참으로 가증스럽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에 상대해 주고 그가 변하기를 바라며 참고 기도해 줍니다. 주님은 자기를 판 유다를 보고도 참으셨고, 고난당하시려 붙잡히시자 “나는 도무지 저를 모른다”고 맹세하고 저주하기까지 부인한 수제자 베드로를 보고도 참으셨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같은 사랑의 경지에 들어서지 못하면 가증되고 외식된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두 얼굴을 한 사람들이 꾸미는 불의와 거짓된 일은 얼마 안 가서 다 드러나고 맙니다.

아합 왕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이방여자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 북방 이스라엘을 우상숭배로 물들게 할 때,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자들이 얼마나 갖은 모략과 궤계를 꾸몄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던 아합 왕이 이방신을 섬기게 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하나님은 3년 6개월간 이스라엘 땅에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게 하셨습니다. 아합 왕은 엘리야의 저주 때문에 바알 신과 아세라가 노하여 비가 오지 않는다고 믿고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고 별별 짓을 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가뭄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백성에게 임한 재앙이란 점을 갈멜 산에서 확실히 알게 됩니다. 누가 불을 내리는 참신이지 가리기 위해 드린 제사에서 여호와께서 불을 내리시자 바알이 가짜인 것을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그때야 모든 백성이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고 외쳤습니다(왕상18:36~39).

우리도 최후에 진리가 확연히 드러날 때까지 거짓 것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의 술객(術客) 얀네와 얌브레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재앙을 내리실 때 자기들의 신도 똑같이 역사한다며 대결했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재앙만 겨우 따라 했을 뿐, 더는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결국 진리를 대적하는 그들의 불의가 드러날 뿐입니다.

우리도 최후에 진리가 밝히 드러날 때까지 속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거짓 것은 호화롭고 찬란하고 당장 이기는 듯해도, 절대 하나님의 역사를 이길 수 없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술수는 언제나 그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본질이 바뀌어야 한다
불의는 우리를 앞으로 더 나아가게 하지 못합니다. 교회에서도 시험 든 사람들은 별별 좋지 않은 생각을 합니다. 차츰 하나님 말씀을 듣고 자기 속의 불의가 드러나면서 그제야 ‘아하, 내가 그때 시험 들어 있었구나’라며 깨닫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시험 들게 했던 못된 근성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 속에 거머리처럼 붙어서 안 떨어집니다. 술수나 거짓, 육신의 소욕은 그 사람의 근성 속에 들어 있습니다. 예전에는 내가 이런 사람이었다, 하는 사람들은 속상하면 옛날 기질이 금세 튀어 나옵니다. 옛날에 하던 못된 습성이 남아서 어느 땐가는 본성을 드러냅니다.

가을 논에 벼 이삭들이 무르익어 다 고개를 숙였는데, 간혹 고개를 빳빳이 곧추세우고 있는 이삭들이 보입니다. 속이 여물지 않은 쭉정이들입니다. 속이 썩거나 비면 언젠가 그렇게 스스로 확연히 본질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 끝까지 속일 수가 없습니다. 바뀌려면 본질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변함이 없어야 할 영적생활
부정한 것은 앞으로 더 나갈 수가 없습니다. 본질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쭉정이는 곡식 창고에 절대 들어가지 못합니다. 타작마당에서 키질로 알곡과 분리돼 불태워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반대되는 이념을 가진 사람도 절대로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우리는 신앙생활만큼은 바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이념과 싸워 이겨서 나를 가로막는 바리케이드가 아무것도 없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환경이 바뀌면 따라서 신앙생활의 중심도 바뀝니다. 환경이 바뀌더라도 신앙생활의 중심은 절대로 바뀌면 안 됩니다. 자기 영혼의 때의 신세를 생각해서 영적생활의 중심을 한결같이 유지해야 합니다.

타성과 습관에 젖어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말세에는 더 나갈 수 없게 하는 최악의 바리케이드가 나타날 텐데 그때 영적생활을 어떻게 해 나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환경에 놓이든 상관없이 신앙생활을 유지해 나가야 합니다. 다른 환경은 다 바뀌어도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바뀌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42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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