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가 전하는 디모데후서 3장 강해(71)] 많은 사람에게 교훈이 되는 믿음의 삶을 살라
‘마지막 때는 이러하니’(71)

등록날짜 [ 2015-05-13 01:11:05 ]

하나님의 능력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있어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아갈 때 참교훈을 줄 수 있는 것

성경에 기록된 사도들의 삶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신앙인들 사이에 여전히 회자(膾炙)됩니다. 이는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그들을 모델로 삼아 주님 심정, 구령의 열정을 지니고 주님 뜻대로 영혼을 살리는 삶을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신앙인들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재현한 사도들을 닮고 싶은 소망이 간절하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을 영혼 구원 사역에 쓰기를 원하셨고, 그들도 하나님께서 얼마나 지옥 갈 영혼 구원하기를 원하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쓰시는 일에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전진했습니다.

죽으면 죽었지 하나님 말씀 앞에서 절대로 비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자기 목숨까지도 맡기는 그들의 강한 믿음을 닮고 싶어 합니다.

이같이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와 동시대를 산 디모데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수많은 사람에게도 살아 있는 교훈을 주는 믿음의 모델입니다.

주님 입장에서 생각하라
그런 반면, 신앙생활 하노라 해도 타인에게 아무런 교훈이나 선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타성에 젖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모델이나 푯대 없이 살아가기에 신앙에 발전이 없고 더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돕니다. 그러다가 신앙의 침체에 빠져 들고 맙니다.

목회자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목회에 뛰어들 때는 예수 몰라 지옥 가는 한 영혼이라도 더 살리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의욕적으로 기도하고 전도하고 심방합니다. 그러다 교인이 점점 늘어나면서 속 썩이는 성도가 하나둘 생깁니다.

목사에게 덤비고, 교회에 들락날락하고, 성도에게 상처 주고… 별의별 교인이 다 있습니다. 목회자와 성도 사이에는 상상할 수 없이 힘든 일이 자주 생깁니다. 이럴 때 목사가 얼마나 지혜롭게 처신하느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목회자로서 처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자기 감정을 앞세우다 보면 “목회 못 하겠다”는 말이 불쑥 나오기도 합니다. 목회자가 내뱉은 그 한마디가 하나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모릅니다.

‘주의 종’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생각지 않는다면 목회는 속상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매사를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면 어떤 어려움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목회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인류를 죄에서, 저주에서, 지옥에서 구원해 주시려고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내가 당하는 것보다 억만 배 심한 고통을 십자가에서 당하셨다. 하찮은 피조물인 우리 인류의 죗값을 갚아 주시려고 창조주인 하나님의 아들이 고의로 육신을 입고 와서 모진 고통을 당하셨다’는 생각을 하면 주님 앞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집니다.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나를 사랑하신 주님을 내가 섭섭하게 해 드리면 안 되지’라는 마음만 있으면 이기지 못할 어려움은 없습니다. 결국 주님 편에 서서 주님과 뜻을 같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에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노력을 부단히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입장과 내 영혼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 한 분만 바라보라
‘이젠 지쳤다. 더는 주의 일을 계속할 힘이 없다. 이만하면 됐다.’ 과거에 한 일을 자랑하고 위안으로 삼으면 더는 주를 위해 할 일이 없습니다. 목회자도 성도 때문에 애 끓일 이유도 없습니다. 성도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속만 끓입니다.

어느 때는 가슴에서 열불이 날 정도로 속이 썩습니다. 그렇다고 성도들에게 분이 나거나 원망스럽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는 성도들이 시험 들고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고 병들어 고통당하는데도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할 때 무척 속상합니다.

그것이 악한 마귀에 의해 당하는 고통인 줄 뻔히 알기에 속이 상하고 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도의 문제를 내 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성도가 어떤 고통을 당하든 아무렇지도 않을 것입니다.

성도의 일이 곧 목사의 일이기에 애가 터지도록 기도하고, 마귀에게 속지 말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이런 목사의 심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성도가 알아주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주님 한 분만 바라보고 성도를 섬기다 보면 훗날 ‘우리 목사님의 삶 자체가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었어’라고 깨닫고 자신들도 그와 같은 삶을 살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생존경쟁에서 이기라
그렇다고 해서 제가 한 일을 자랑으로, 교훈거리로 남기려고 성도를 사랑하며 목회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신 주님의 피 공로가 헛되지 않도록 한 영혼이라도 더 살려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오직 그분께만 영광 돌리기 위해서 목회합니다.

또 내 영혼의 때에 신세를 생각해서 주님 앞에 가서 영원한 상급을 얻으려고 주의 일을 합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자연적으로 삶의 결과가 교훈으로 남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일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는 것은 다른 의도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한마디로 영혼의 때를 위한 자발적인 거룩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는 방편입니다. 바울이 말만 앞세우고 그렇게 살지 않았다면 ‘말쟁이’ 취급을 받았을 터이고 그런 이중적인 모습 때문에 디모데는 오히려 역겨워했을 것입니다.

영혼을 맡아 섬기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이 자기가 섬기는 사람들에게 역겹게 느껴지게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어쩌면 저렇게 하나님 말씀대로 철저히 살 수 있을까’라는 교훈을 줄 수 있게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모든 교훈을 행동하는 믿음의 삶으로 남겼지, 말로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주고자 하는 모든 교훈을 믿음으로 소유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43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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