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한 없는 열애(熱愛) (19)] 아버지와 아들의 인류를 향한 사랑

등록날짜 [ 2015-06-29 15:59:14 ]

피조물 인간을 대신해 창조주 하나님 아들이 죽으시다니

그 감당할 수 없는 진실하고 애절한 사랑을 받아들여야

마태복음 26장을 읽을 때마다 가끔씩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시던 절규의 기도 소리가 귀에 생생하게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26:36~46).

나를 죄에서 살리기 위해 이토록 애절한 죽음을 향한 절규를 읽을 때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절감하고 우리에게 어찌 이런 큰 사랑, 그토록 큰 끝없는 사랑을 베푸시나하는 생각에 감사가 북받쳐 오열할 때가 있습니다.

참된 사랑을 느낄 때

어떤 사람이 만 원짜리 물건을 천만 원을 주고 샀다고 한다면 누구라도 어찌 그런 미련한 행동을 했느냐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도 한낱 죄로 멸망할 쓰레기 같은 자들이요 피조물인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큰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어떤 큰 가치가 있기에 자기의 품속에 있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대신 죽이셔야만 했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큰 손해지만 우리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는 너무나 좋아서 감사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과 똑같은 사랑을 받고 있음에 대해 점점 감각이 무뎌집니다. 탕자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간섭처럼 느껴 결국 집을 나간 것을 보면 우리 인간은 자신이 받는 사랑에 대하여 참으로 무감각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때로는 자기의 잘못으로 인해 문제가 생겼어도 하나님이 계시면 이럴 수가 있느냐며 하나님께 책임을 돌립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을 오해하는 태도가 하나님의 사랑 앞에 무감각한 자세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분량이 너무 크기에 적은 우리의 지식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 표현할 수 없고 고백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사랑을 받은 우리가 감각이 무뎌져서 감사할 줄도, 고마워할 줄도 모른다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배은망덕한 일입니까? 인격이 없는 개도 주인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밥을 준 것을 잊지 않고 꼬리를 흔들면서 반갑다는 표현을 하는데 말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제한 없는 사랑을 받고도 무감각하다면 속히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끼리의 감성에는 사랑받은 분량만큼 표현하고 감사하고 살면서, 어찌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에 대한 영적인 감성에는 그리도 인색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영적인 감성에 눈 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아 영육 간에 행복해야 합니다.

아들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26:39) 하며 간절히 기도하실 때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22:44).

그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절규어린 사랑의 기도에 하나님 아버지는 침묵하셨습니다. 인간을 사랑하기로 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아들의 죽음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며 죽을지라도 인간이 영원한 지옥으로 멸망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결단이셨습니다. 이와 같은 사랑의 힘은 아무도 막을 자도 없고 막을 길도 없습니다. 이와 같은 사랑의 힘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셨으니 우리는 무한 감사할 뿐입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22:44)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자기 아들의 절규를 뿌리칠 부모가 있을까요? 이마에서 떨어지는 땀방울이 핏방울같이 될 정도의 절규라면 아들의 기도가 얼마나 처절했는지를 말해 줍니다. 그러나 자기가 가진 모든 능력, 즉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있는 것을 없게도 하시며 없는 것을 있게도 하시는 그 모든 능력을 오직 인간을 위해 말없이 내려놓으셨습니다.

아들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선택을 하실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고통과 아픔의 깊이를 우리가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70, 80년 살다가 사라질 우리 인간도 자기 자식의 목숨을 그렇게 죽음으로 내어놓을 수 없는데, 하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 인간을 위해 죽인다고 할 때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하시고 실천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은 도무지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하시고 상상할 수 없는 무제한의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 인간이 멸망의 지옥에서 벗어나 영원히 행복한 천국에 가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심정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진실하고 애절한 사랑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계속


제한 없는 열애

윤석전 목사 / 연세말씀사

위 글은 교회신문 <44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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