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가 전하는 디모데후서 3장 강해(86)] 말세에는 사랑할 수 없을 때가 오나니
‘마지막 때는 이러하니’(86)

등록날짜 [ 2015-09-02 12:44:17 ]

신앙생활은 위로 하나님을, 아래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
마지막 때가 다가올수록 이기적인 생활이 극치를 이뤄


마태복음 24장에는 말세가 되면 사랑이 식어진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9~12).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말씀하신 이 예언은 특히 말세를 당한 기독교인에게 일어날 일들을 잘 보여 줍니다. 지금 시대는 이기주의가 판을 쳐서 사랑이라는 말을 쓸 만한 곳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입니다.

매사에 투쟁적, 선동적, 자기중심적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같이 사랑할 수 없는 말세가 와도 끝까지 사랑해야 한다고 당부합니다.

인본주의 사랑은 태양 앞에 반딧불
환한 대낮에는 전깃불을 켜 놓아도 효과가 없습니다. 오히려 대낮에 전구를 켜 놓으면 볼썽사납고 민망합니다. 전력 낭비니까요.

죗값으로 지옥 가서 온갖 고통당할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서 십자가에 못 박아 피 흘려 죽이기까지 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도 저 태양 빛처럼 이글이글 타오릅니다.

그 앞에 드러난 인간의 인본주의적, 박애주의적인 사랑은 대낮의 반딧불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고 숭고한 사랑 앞에 인간의 사랑은 반딧불과 같이 만져도 따뜻하지 않고 그 빛도 희미하기만 합니다.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달리, 예수를 믿노라 하는 사람들의 사랑은 한낱 말잔치로 끝날 때가 많습니다.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고, 말로만 주님 뜻대로 산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말로만 신앙생활 하는 교인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대성전을 건축하기 전, 우리 교회 예배석은 은혜받으러 몰려드는 사람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새신자가 뒤늦게 예배에 참석하면, 예배위원들이 앞자리에 앉은 기존 성도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면 주님 사랑을 오래 받았다는 기존 성도가 화를 냅니다. 설교하다가 그 모습을 바라보면 안타깝다 못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예배에 와서 하나님 말씀에 은혜받는 목적은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로 예수 몰라 죽어 가는 영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을 거라면, 하나님 은혜는 받아서 무엇합니까.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어 인류의 죗값을 갚아 주시는 고귀한 희생의 사랑을 베풀면서 인간이 구원받을 모습을 보고 기뻐하고 만족해하셨습니다.

최고의 사랑은 베풀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같이 우리도 이웃 영혼이 구원받도록 사랑하고 그가 예수 생명 받은 것에 기뻐하고 만족을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지옥 갈 영혼을 사랑해 구원해 주는 기쁨이 최고의 낙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했습니다(요15:13). 세상 사는 동안에는 목숨이 가장 귀합니다.

그 귀한 목숨을 친구를 위해 준다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어 가는 친구를 위해서는 내 목숨을 대신 준다 해도 친구를 살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 목숨은 쓸 데가 없습니다. 죄인인 우리는 남을 대신해 죽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인이시기에 인간의 죗값을 갚으시려 죽으시고 우리를 살려 내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를 전하는 전도만이 지옥 가는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전도만이 가장 값지게 목숨을 쓰는 길입니다. 전도에 목숨 거는 것이 제일 값진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진정 이 사랑이 있다면, 내가 전도에 늑장 부릴 때 수많은 영혼이 지옥 가지 않을까 조급해질 겁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눈물겹게 우리 인류를 사랑하셨는데,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천박스럽게 봅니다.
전도자가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라고 말하면 “여보시오, 당신이나 믿어!”라고 냉소합니다. 예수 전하는 사람을 천박스럽게 봅니다.

그러면서도 인본주의, 박애주의 사랑은 귀하게 봅니다. 기독교계에서 무슨 행사를 할 때도, 박애주의에는 초점을 두면서도 영혼을 지옥에서 건지는 진짜 영원한 사랑에는 별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을 많이 봅니다.

세상이 인정하는 가치와 믿음 안에 있는 가치는 이처럼 다릅니다.

나 자신부터 사랑해야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사랑해 주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일은 예수를 믿는 일이며, 신앙생활은 자기 사랑의 극치입니다. 또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전도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먼저 자기의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저도 제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 설립 후 20년간 연중무휴 매일철야기도를 하며 성령으로 목회하려 애썼고, 지금도 성령이 감동하시면 전 세계 어떤 나라든지 가리지 않고 날아가서 목숨 내놓고 구령의 열정으로 설교합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목숨 걸어 가며 설교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랜 시간 쉬지 못하고 진액을 짜내듯 설교하면 몸은 무척 힘듭니다.

영적인 사랑은 아무리 육신이 힘들고 어려워도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삽니다. 이것이 내 영혼의 유익입니다.

바울은 평생 자기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랬기에 그 시대에도 주님 사랑을 품고 수많은 사람에게 전도해서 지옥에서 건져 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복음 전하는 동안에 멸시받고 천대받고 옥에 갇히고 온갖 잔인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영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말세에 잔인한 대우를 받고, 목 베임 당한다고, 이미 성경에서 말했습니다.

그러니 누가 선뜻 이 사랑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랑의 가치를 알고 내 영혼을 사랑하는 유익을 아는 사람은 바울과 같이 예수의 사랑을 택할 것입니다. 그것이 나 자신을 사랑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44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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