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가 전하는 디모데후서 3장 강해(89)] 영원한 소망을 위한 신령한 인내가 필요해
‘마지막 때는 이러하니’(89)

등록날짜 [ 2015-09-22 11:25:12 ]

어떤 고통도 참고 견디는 자만이 주님과 교감을 이루니
끝까지 믿음의 고지를 정복하고 최고의 상급을 받아야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마지막 때는 ‘인내’하라고 당부합니다.

사랑으로 맺은 관계
앞으로 좋은 기회가 얼마든지 있는데도 기다리지 못해서 그것을 빼앗기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기다리다 보면 때가 차고, 환경과 상황이 차츰 열릴 텐데 인내하지 못해서 좋은 기회를 다 놓치고 맙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이 인내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어떤 고통과 어려움이 와도 주님을 부인할 수 없어 끝까지 인내하는 것은 주님이 나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셨기에 아무리 속상해도, 아무리 피곤해도 믿음의 경주를 멈출 수 없습니다. 아무리 못 견뎌도,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주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인내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사랑받았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했는지 조금이나마 그 십자가 사랑의 고통을 알기 때문에, 사랑하신 주님을 실망시킬 수 없고, 그분을 아프게 할 수 없고, 그분을 배도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의리입니다. 의리가 없는 사람은 제아무리 똑똑해도 순간에 자신의 유익에 따라 배신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게 베푸신 사랑의 분량을 깨달으면 어떤 고통이 와도, 심지어 죽음이 와도 배신하지 않고 참아낼 수 있습니다.

주님과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에 주님이 맡기신 일을 이루기 위해서 죽어도 인내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배신하지 않는 한, 나도 주님을 배신하지 아니하리라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사랑받은 자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를 낳으시고 사랑으로 기르신 분이기에 죽어도 부모를 배신할 수도 없고, 순종하고 공경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도 받은 분량을 아는 만큼 견디고, 아는 만큼 깨닫고, 아는 만큼 인내하고, 아는 만큼 주님이 마음 상하지 않도록 그분의 심기를 살피며 철저하게 주의 일을 실행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받았기 때문에, 이 은혜 때문에 인내하는 것입니다.

인내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운다
성도가 인내하는 둘째 이유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충성하다 포기하면 면류관이 없고, 전도하다 포기하면 저 영혼이 죄로 지옥 가니까 포기할 수 없고, 찬양하다 그만두면 하늘의 영광을 얻을 수 없기에 멈출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주의 일을 끝까지 인내하는 이유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순교하기 전 로마 옥중에서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고 말했습니다(딤후4:7~8).

면류관을 얻기 위해 끝까지 인내했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소망’은 아무리 몸이 아파도, 속이 상해도, 마음이 연약해도 흔들리지 않고 인내하며 굳게 서게 합니다.

우리 주님이 인류 구원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유대인에게 잡히셔서 로마병정에게 넘겨져 매 맞고, 저주받고, 비참하게 끌려 다니고, 골고다에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올라가는 것은 다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채찍에 맞아 피 흘리심으로 인류가 치료받고, 자기가 십자가형을 당하는 저주를 받으므로 인류가 복을 받고,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심으로 인류가 죄 사함을 받아 그 속죄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고 지옥 멸망에서 나온다는 위대한 소망 말입니다.

인내하지 못하면 피곤에도 지고, 성질에도 지고, 자존심에도 집니다. 인내하지 못하면 돈에도 지고, 환경에도 집니다. 이처럼 ‘인내’는 아무것도 흔들 수 없고, 오직 반석 위에 세운 집처럼 굳게 서 있게 합니다.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말은 인내의 터 위에, 흔들릴 수 없는 터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인내하는 사람만이 주님과 교감을 이루어 주님과 하나가 됩니다. 소망 없이는 절대로 인내하지 못합니다.

목사인 저도 하늘의 면류관, 주님 나라에 가서 받는 칭찬, 순교자가 받는 위대한 왕권같은 신령한 내일의 소망이 없다면 이렇게 사력을 다해 목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대충대충 목회한다고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왜 다른 사람에게 제 일을 맡겨 하늘의 상을 뺏깁니까? 왜 면류관을 뺏깁니까? 내가 하늘에서 영원히 누릴 상급인데 말입니다. 경주자가 끝까지 인내하며 달음질하는 것은 그 후에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라톤 선수가 42.195㎞를 완주하자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도 왜 헉헉거리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릴까요? 그 고지 너머에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인내하는 것입니다. 소망 없이는 인내하지 못합니다.

목숨을 투자하는 인내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가 백 번, 천 번 핍박을 받아도 인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핍박받으면 받을수록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이 없다면 우리가 지금 무엇하는 짓입니까? 소망 없는 인내는 개죽음이요, 바보짓입니다. 이 소망 때문에 견디는 것입니다.

20년 전만 해도 제가 동년배들보다 십년은 나이가 들어 보였습니다. 연중무휴 철야하며 목회하랴, 흰돌산수양관 동.하계성회를 일 년이면 각기 두어 달씩 인도하랴, 국내외 성회 인도하러 다니랴, 주의 일에 생애를 잔인하리만치 쏟아부으니까 그렇습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소망 때문입니다. 그 소망 속에서 얻는 것이 얼마나 크기에 목숨을 잔인하게 투자하느냐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는 목숨이 제일 크니까요. 왜 그 귀한 것을 내놓느냐는 것입니다. 영혼의 때를 위한 소망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기에 힘들어도, 어려워도, 견딜 수 없어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끝까지 믿음의 고지를 정복하고 최고의 상급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45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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