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가 전하는 디모데후서 3장 강해(91)] 믿음의 정조가 있어야 환난을 이긴다
‘마지막 때는 이러하니’(91)

등록날짜 [ 2015-10-07 12:24:24 ]

신앙생활은 참고 견디고 인내하는 영적생활이니
어떤 경우에서든 믿음에서 결코 떨어지지 말아야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마지막 때는 “인내하라”고 당부합니다.

최악의 경우에도 믿음 지키며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많은 국가에서 예수 믿는다고 핍박해서 옥에 가두거나 잡아 죽이는 예는 많지 않습니다. 물론 북한처럼 성경책만 발견돼도 수용소에 보내고 총살하는 종교 인권 최하위국도 있지만 말입니다.

이처럼 평안하게 신앙생활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기도하는 사람은 권총으로 쏴 죽인다”고 위협한다면, 과연 죽을 각오로 하나님께 기도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또 만약 누군가가 “예수 믿으면 죽인다! 예수를 부인해!”라며 이마에 총을 들이댄다면 예수를 나의 구주라고 끝까지 외치다 순교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는 호언장담했습니다. “내가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붙잡혀 가야바 안뜰에서 신문받으실 때 세 번이나 주를 부인했습니다. 심지어 저주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목숨을 위협받는 자리에, 죽음의 면전까지 가 봐야 주님과 당신의 의리가 어느 정도인지, 하늘에 둔 소망이 어느 수준인지, 자기 영혼이 얼마나 사랑받는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믿음이 변치 말아야 합니다. 평안할 때든 기쁠 때든 최악의 경우가 됐든 언제나 동일한 믿음을 갖는 것이 우리의 기도 제목이 돼야 하고, 우리의 간증이 돼야 합니다.

소망을 향한 정조가 있어야
6.25 사변 당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옥에 가둘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공산당의 총칼이 두려워 주를 부인했습니까. 하늘 소망, 주님과 관계, 자기 영혼의 때에 대한 확신, 이 세 가지가 확실치 못하니까 그 값진 신앙을 총칼 앞에 무참히 내던졌던 것입니다.

우리는 목숨보다 값진 신앙을 가졌기에 목숨은 뺏겨도 믿음은 뺏길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값진 신앙을 가진 얼마나 많은 목사와 성도가 북한 공산당 앞에서 순교했습니까?

왜 그렇게 죽어 갔습니까? 목숨은 뺏겨도 신앙은 지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앞선 일제강점기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핍박과 고난이 두려워 주님을 부인하고 신사참배 했습니까?

그러나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하고, 죽기까지 소망 가운데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주님과 관계를 지키다가 순교했습니까?

우리는 정조 있는 사람, 지조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정조를 지킨 자, 믿음의 정조가 있는 자를 마지막 때 끝까지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을 향한 믿음의 정조가 있고, 소망을 향한 정조가 있고, 자기 영혼을 향한 정조가 있고, 오직 주님 사랑에 대한 정조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 없이 인내할 수 있습니까? 그냥 무조건 참습니까? 어떻게 참고 무엇으로 견딥니까?

조선 시대 소설 『춘향전』에 나오는 주인공 춘향이는 변 사또에게 잔인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무엇 때문에 정조를 지키며 인내했을까요?

이몽룡 도령이 장원 급제해서 “암행어사 출두요!” 하고 돌아올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는 이 도령과 한번 맺은 가약(佳約)을 배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의 정조도 이와 같은 이유로 지켜야 합니다. 첫째, 주님과 우리가 맺은 언약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늘에서 상 받을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만약 우리가 정조를 잃고 믿음을 떠나면 주님과 나의 관계가 어떻게 될 것인지 알고 내 영혼의 때에 닥칠 신세를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믿음의 정조를 지켜야 합니다.

이 세 가지를 한 번에 이루는 유일한 비결은 인내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매력 있고 멋집니까? 이런 확실한 소망 없이는 인내할 수 없습니다. 인내를 이룰 수 없고 기다릴 수도 없습니다.

소망이 있기에 인내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고난보다 큰 것이 보일 때, 고난보다 큰 것을 만났을 때, 고난보다 더 큰 것이 나타나길 기대하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인내합니다.

목적이 없으면 인내할 수 없습니다. 목적이 분명할 때 인내합니다. 죽기까지 인내하는 목적이 확고부동하길 바랍니다.

주님과 절정인 관계를 이룬다
내가 정말로 버림받고, 무시를 당하고, 외롭고, 인간으로 견딜 수 없는 천대를 당하고, 인간으로 최악의 경우에 처할지라도 주님 일이 잘돼야 한다는 영적인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소망 없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나’라는 존재를 과대평가하지 마십시오. ‘나’는 주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가장 무익한 자이기에 주님이 도우셔야 합니다. 바울도 자신을 무익한 자, 죄인 중의 죄인 괴수, 쓸모없는 인간이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들어 쓰신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삶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3~15).

우리 모두 끝없이 인내하고 견뎌서 먼저는 주님과 관계가 절정을 이루기를 바라고, 하늘의 상과 위대한 영광이 있길 바라며, 영적생활이 최상의 절정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인내로만 얻어 낼 수 있습니다.

‘주여, 내게 준 모든 기업을 인내 없어 내던지지 말게 하시고, 인내로 모조리 얻어내게 하옵소서!’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45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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