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한 없는 열애(熱愛) (34)] 사랑을 실은 행복한 수레로 쓰임받기를

등록날짜 [ 2015-10-26 11:49:28 ]

하나님 사랑은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

그 사랑을 이웃에게도 아낌없이 전해 주어야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도 없고 적도 없으며 항상 열려 있는 곳간처럼 끊임없이 퍼 주기만 합니다. 육신의 소욕으로는 할 수 없는 영적인 사랑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살전2:8)고 말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모한다는 말입니다.

목사가 성도를 사모하고 성도가 목사를 사모하고 성도가 성도를 사모하여 서로 만날 때마다 기쁨이 충만하다면 얼마나 대단한 사랑입니까? 물론 하나님의 사랑은 영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바울은 예수 전하는 일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이웃을 사랑했기에 기쁨으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목숨이라는 수레에 하나님의 사랑을 실었습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을 목숨보다 크게 여기고 그 사랑으로 구원받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기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아들을 내놓으셨고 아들도 사랑 때문에 죽으셨으며 제자들도 사랑 때문에 순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이웃에게 운반할 때 나의 수고로 하나님의 사랑이 이웃에게 전해져 생명이 되도록 분명하게 해야 하고, 사랑을 전한 결과가 있다면 전한 내게도 기쁨이 될 것입니다

사랑은 주면 줄수록 커지고 기쁜 것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3:17)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대로 죄인인 인간을 대신해 고통당하고 죽으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아들의 아픔과 고통과 죽음으로 인류의 죄가 해결되고 인류가 구원받는 모습을 미리 바라보며 기뻐하신 것입니다. 아들은 처절하게 고통당하며 죽을지라도 우리 인류가 죄에서 지옥에서 구원받는 일이 하나님의 기쁨이라니, 정말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크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받는 사람에게는 플러스요, 주는 사람에게는 마이너스 같습니다. 수학적으로 계산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무조건 손해를 봅니다. 그런데 왜 사랑은 하면 할수록 기쁠까요?

부모는 자식이 잘되기만 한다면 자기가 어떤 고생을 하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기뻐합니다. 부모도 자식을 이처럼 사랑하는데, 하물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아들은 죽어도 우리가 사는 것이 좋다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한 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도무지 하나님의 사랑 앞에 눈물 흘리며 겸손하게 충성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관계성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남의 자식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그들에게는 무관심합니다. 그러나 내 자식은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가르치고, 좋은 학교 보내고 싶은 생각이 가득합니다. 인간의 인본주의적인 사랑은 가까운 혈통끼리만 진실하지, 촌수가 멀수록 그 사랑도 점점 식어 갑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은 태초부터 세상 끝 날까지 존재하는 모든 인간을 똑같이 사랑할 수 있을까요? 도대체 하나님과 우리가 어떤 관계이기에 그토록 사랑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그저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을 독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을 독점하고 싶은 야심으로 남들이 다 자는 한밤중에 홀로 깨어 밤이 새도록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독점하고 싶은 만큼 이웃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도 생깁니다. 영적인 하나님의 사랑 속에는 미운 사람도 없고 불평불만도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더 사랑해 주지 못해서 아쉽기만 합니다. 성도들에게 툴툴거릴 일이 생기면 , 내가 저들을 더 사랑하고 영적으로 잘 길러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구나하며 아쉬워합니다. 그 까닭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내 평생에 영원히 메마르지 말아야 할 것이 사랑입니다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3:11)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아담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3:12) 하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하와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아내가 아무리 권유해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먹지 말았어야 하는데, 모두가 제 잘못이니 용서해 주십시오라며 자기 죄를 솔직히 고백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오히려 아담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으니 하와를 주신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고 책임을 피하려 합니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이 없습니다. 오히려 비굴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끝까지 책임지시는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전해 줄 수 있다면 그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운반하는 수레와 같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주는 사람도 그 사랑이 자기 것인 양, 내 것을 주는 것처럼 인심 쓰고 줘서는 안 됩니다. 또 하나님께 충성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전도한다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 하지 않고 인본주의나 박애주의로 사람 앞에 한다면 자기 의로 사랑한 것입니다. 한 영혼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주고 자랑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실어 나른 만큼 하늘에 상이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나르는 수레로 쓰임받았다고 감사해야 합니다. <계속>


제한 없는 열애

윤석전 목사 / 연세말씀사

위 글은 교회신문 <45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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