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가 전하는 디모데후서 3장 강해(94)]겉과 속에서 오는 모든 핍박을 이겨야 한다
‘마지막 때는 이러하니’(94)

등록날짜 [ 2015-11-03 21:13:11 ]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자는 환난이든 시험이든
어떤 핍박에서도 능히 이길 힘과 능력으로 충만해

핍박하는 목적은 예수에게서 끊어 놓아 결국 그 영혼을 지옥에 끌고 가겠다는 악한 마귀의 속셈입니다. 따라서 핍박을 이겨야 하는 목적만 분명히 안다면, 죽음이 올지라도 못 이길 핍박은 없습니다.

그런데 핍박보다, 환난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시험은 자기 속에서 불평불만이 올라오고, 기분이 나쁘고, 남들보다 잘나고 똑똑한 것 같고, 욕구가 충족이 안 될 때, 속에서 썩는 것입니다.

밖에서 비바람이 세게 치고, 어떤 문제가 닥쳐와도 자신만 견고하면 절대로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속에서 뿌리째 썩으면 금세 넘어집니다. 강단에서 목사가 아무리 은혜롭게 설교해도 속에서 썩어 있으면 무너집니다.

시험 들면 결국은 교회에서 슬며시 뒷자리로 물러납니다. 환난과 핍박은 목 베임을 당해도 이기지만 유다처럼,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속에서 시험 드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자기 속에서 썩는 사람은 우선 안색부터 변합니다. 핍박과 환난을 받아서 이기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환희가 넘치고, 패기가 넘치고, 힘이 넘칩니다.

그런데 속에서 썩어 가는 사람은 교회에 와서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전혀 은혜받지 못하고, 설교가 길다고 투덜거리기 시작합니다.

핍박과 환난을 타살에 비한다면, 내 안에서 시험 드는 것은 자살과 같습니다. 우리는 타살도 자살도 없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육신의 소욕 자체가 시험
저는 신앙생활 하는 동안, 핍박받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봤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교회일수록 핍박받는 성도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과 성령은 다르고,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소욕으로 사는 사람과 성령의 소욕으로 사는 사람은 부부간이라도 밤낮 다툽니다. 육신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신의 소욕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롬8:7).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극과 극입니다. 육신의 소욕에 빠지는 자체가 시험에 든 것입니다. 속에서 시험 들기 시작하면, 자신도 모르게 무너집니다.

남들이 기도하면 ‘나도 옛날엔 저렇게 했는데...’ 할 뿐, 기도할 힘이 없습니다.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시험 들어서 썩고 무너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서 에베소 교회에 쓴 편지에서, 첫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책망했습니다(계2:4~5). 첫사랑을 잃으면 속에서 나태와 게으름으로 썩어 갑니다.

‘사랑이 충만하라’는 말과 ‘생명이 충만하라’는 말은 같습니다. 그러니 첫사랑을 잊으면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핍박을 이겨 하늘나라 영광을
예수 믿는 신앙생활은 물질도, 목숨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 내던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에 반대되면 가차 없이 던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은 물질보다 크고, 환경보다 크고, 자식보다 크고, 아내나 남편보다 영원히 큽니다.

신앙생활 자체는 지구상에서 최고로 큰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크게 여기지 못하는 자가 시험 들고, 핍박과 환난이 오면 견디지 못하고 포기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크게 여기는 사람은 별별 문제가 닥쳐와도 그것 때문에 신앙생활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너무나 큰 것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다 뺏겨도 믿음만은 안 뺏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시험 들겠습니까. 핍박이 온들 무너지겠습니까.

‘나는 죽으면 죽었지 예수를 뺏길 수 없다, 나는 죽으면 죽었지 신앙생활을 양보할 수 없다, 한 치도 양보 못 한다’ 할 때 순교자가 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순교자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대접을 받는지 상상할 수 없다는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생을 가진 자입니다.

우리가 가진 영생으로 행복을 극치에 달하게 누리며 살기를 바랍니다. 이런 매력의 극치를 아는 사람이 그까짓 핍박에 무너지겠습니까.

천국의 화려한 영광은 이 땅에서 지긋지긋한 큰 고난을 지불한 결과입니다. 이 땅에서 편하다고 기뻐하지 말고, 예수 까닭에 큰 고난이 있다면 하늘나라에서 화려한 영광이 준비된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누릴 신령한 화려함을 고대해야 합니다.

바울은 “현재 당하는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롬8:18). 오늘 핍박이 오고 고통이 오거든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내게 선물로 주시겠구나’ 기대하며 이기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나태와 게으름과 싫증과 피곤이 몰려와서 속에서 고장이 나거든 ‘사형 선고구나’ ‘내가 자살하는 거구나’ 생각하고 정신 바짝 차려서 이기시기 바랍니다.

영적 승리를 쟁취하자
밖에서 오는 핍박, 안에서 오는 핍박 곧 시험, 이 두 가지를 다 이겨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 말했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3~24).

이 엄청난 내적 투쟁을 한 사도 바울은 결국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했다(롬8:2)고 고백합니다.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해서 바깥에서, 안에서 오는 모든 핍박과 환난과 시험에서 대승리하여 하늘나라에 가서 큰 영광의 주인공이 되길 바랍니다.

저는 그 주인공이 되려고 전 세계로 다니며 성회를 인도합니다. 사람의 육체로는 감당이 안 될 만큼 피곤이 도를 넘어서도 절대로 이 믿음의 경주를 멈추지 않습니다.

어차피 신앙생활은 하늘의 상을 바라보며 목숨 걸고 하는 것이니까요. 이 땅에서 겪는 이 적은 환난과 핍박을 지불하고 하늘에서 30배, 60배, 100배, 1만 배를 얻으려고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피 흘려 죽여 구원하신 사랑을 받았으니, 나도 주님 사랑 받았다는 증거로 목숨 걸고 주의 일을 하며 이를 간증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하여 모든 핍박에서 영적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5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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