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가 전하는 디모데후서 3장 강해(96)] 고난으로 쌓이는 영적 플러스를 보라
‘마지막 때는 이러하니’(96)

등록날짜 [ 2015-11-18 00:07:04 ]

주를 위해 당하는 환난은 영혼의 때 큰 보상이니
신령한 작품을 남겨 주님과 만나는 승리자가 돼야


목사로서 제 하루 일정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할 때가 잦습니다. 때때로 지구 반대편 나라로 수십 시간 걸려 날아가 바로 성회를 인도합니다.

시차 적응이라는 말은 사치로 여겨질 만큼 몸을 혹사하며 “나는 죽어도 너희는 살라”는 예수 정신으로 영혼을 살리려고 시간을 아껴 복음 증거에 진액을 쏟습니다.

제가 전하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목사님들이 성령이 충만해지고 성도들이 새로워져서 이제는 기도하며 살리라, 예수 몰라 지옥 가는 영혼에게 전도하며 살리라, 주를 위해 충성하며 살리라 결단하는 모습을 보면 육신은 고난으로 힘들지만, 마음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넘칩니다. 제가 받는 고난이 전 세계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영적인 플러스가 되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자청한 사도 바울
바울은 예수 믿을 때 당하는 고난을 자청한 사람입니다.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할 때 주변 많은 사람이 극구 만류했습니다. 유대인이 바울을 죽이려고 대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만류를 뿌리치며 말했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3~24)

바울은 고난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으로 과감히 뛰어들었습니다. 사도행전 25~26장을 보면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기 직전에 가이사랴에서 로마 총독 베스도와 유다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을 위해 변호하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를 더 강력하게 전했습니다. 고난을 자청하면서 그 가운데로 뛰어드는 바울이 미친 사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스도 총독은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는구나”라고 꾸짖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네가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네가 무엇이 부족해서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아 죽은 예수에게 미쳤느냐?”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베스도 총독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그립바 왕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강권했습니다.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이 말은 아그립바 왕도 예수를 알면 자기처럼 예수에 미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제대로 알면 어떻게 변합니까? 남들이 예수를 어떻게 보든 상관없이 예수를 구세주라고 전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려고 합니다.

이 엄청난 축복은 은혜받은 자 외에는 모르기 때문에  불신자들은 “예수 믿어서 무슨 경제적 유익이 있느냐? 예수 믿어서 출세하고 돈 번 사람이 있느냐? 예수 믿으면 늘 손해만 보지 않느냐?”라며 예수 믿는 사람들을 미친 사람 취급하며 핍박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영적 플러스 요인을 모르니 예수 믿는 재미를 못 느낍니다. 반면에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영적 플러스 요인, 즉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죽음 후 하늘에 가서 받을 상의 영광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아는 사람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받는 고난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보상하시는 값진 고난
고난은 주님을 따를 때 누구라도 받게 됩니다. 예수께서 직접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자에게는 그와 같은 고난이 닥친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가신 십자가 길은 인류의 영혼을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살리기 위한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를 위한 일에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그만큼 수많은 영혼이 살아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당하는 고난만큼 지금 예수와 함께하고 있다는 증거이기에 고난은 값지고 보배롭습니다.

인생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당하는 고난이 누군가가 보상하는 고난이냐, 보상이 전혀 없는 고난이냐에 따라 차원이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수고와 고난의 시간들이 주님이 보상하실 값진 고난으로 가득하다면 이보다 더 큰 영광은 없을 것입니다.

주를 위해 자원하여 당하는 고난
핍박과 고난은 다릅니다. 핍박은 내가 받기 싫어도 당하지만 고난은 내가 받기 싫으면 그만입니다. 그런 점에서 고난은 자원하는 일입니다. 주님이 고난당할 때를 보십시오.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자원했습니다.

또 유다를 앞세워 로마 군인들이 예수를 체포하러 오자 베드로가 칼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을 때, 예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26:53~54).

예수께서는 자신이 고난을 당해서 아버지 뜻이 이루어진다면 죽기까지 그 고난을 자청하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당하는 고생은 고난이 아닙니다.

진정한 고난은 내가 잘못한 것 없이 주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내가 당하지 않으면 주의 일이 안 되기 때문에 뛰어드는 것이 고난입니다.

우리는 내 목숨을 주를 위해 당할 고난의 밑천인 줄 알고 감사함으로 고난을 자청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고난으로 받을 영광이 보여야 합니다. 고난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나는 실제상황입니다.

고난이 올 때 “주여, 제게 어떤 고난이 와도 이 일을 해야 합니다”라며 고난을 피하지 말고 푹 뛰어들어야 합니다. 고난으로 만들어진 신령한 작품을 가지고 영혼의 때에 주님과 만나는 믿음의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45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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