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가 전하는 디모데후서 3장 강해(101)] 하나님이 믿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마지막 때는 이러하니’(101)

등록날짜 [ 2015-12-22 20:40:18 ]

무서운 핍박 속에서도 승리할 믿음이 있으면
주님께서 능히 이길 능력을 한없이 주실 것
 

하나님은 우리를 일방적으로 사랑하시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믿지는 않으십니다. ‘믿는다’는 말에는 큰일을 맡긴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고난에서 건지신다
하나님은 바울을 사랑하고 믿었습니다. 바울이 믿을 만하게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강의 위협이나 물의 위협이나 산의 위협이나 동족의 위협 등 모든 위협을 끝까지 참고 견뎠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돌에 맞았다가는 잘못하면 죽고, 태장(笞杖)에 맞아 장독 났다가는 자칫하면 죽습니다. 또 가죽 끈으로 맞으면 살갗을 파고드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죽고, 옥에 갇히면 뼛골 쑤시는 추위를 견딜 기력이 없어 죽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고난들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거기서 나를 건지신다”는 믿음 덕분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증거하다 맞는 고난이라면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의기양양하게 당할 수 있습니다. 고통당하는 분량보다 더 크게 보상하실 분이 그 현장을 보고 계시다는 확신만 있으면, 의기양양하게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어릴 때 다닌 교회에서는 그 많은 성도 중 세 가정만 목숨을 걸고 하나님 말씀을 지켰습니다. 그중에 우리 집도 포함됩니다. 그 세 집 식구들이 얼마나 핍박을 많이 받았는지 모릅니다.

가족들이 교회에 못 가게 하려고 무섭게 매질했습니다. 믿음의 가족들은 그렇게 맞아도 기어이 교회에 갔습니다. 매 맞는 고통보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고통이 더 견디기 힘들었으니까요.

저도 어린 나이였지만, 아버지에게 아무리 맞아도 교회는 꼭 다녀왔습니다. 그래야 속이 시원했습니다. 또 군대에서는 주일에 일하지 않고 교회 간다고 무서운 매질을 당해도 교회 가서 예배드리고 왔습니다.

그래야 만족스러웠습니다. ‘또 다음 주일에는 어떻게 교회에 갔다 오지?’ ‘교회에 못 가면 어떻게 하지?’ 늘 교회에 못 가게 될까 봐 노심초사했지, 매 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바울도 매 맞을까 봐 두려웠던 것이 아니라 전도하지 못해 수많은 영혼이 지옥 갈까 두려웠습니다. 믿음 지키는 일로 고난당할 때 이를 이겨 내려면, 주님께서 이길 힘을 주시는 방법뿐입니다. 고난에서 건지실 주님이 역사하셔야 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못 이깁니다.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핍박과 시험을 당하다 좌절했다면, 신앙생활 하는 목적을 제대로 알지 못한 사람입니다. 매 맞거나 고통당하거나 옥살이했다고 시험 들어 넘어졌다면, 신앙생활의 목적을 희미하게 안 사람입니다.

신앙의 목적을 확실히 알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을 끝까지 놓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끝까지 견디는 자를  고난에서 건져 주십니다.

저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신앙생활 한 사람이 별로 없고, 저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목회한 사람도 별로 없고, 저처럼 목회하는 동안 잔인하리만큼 심한 핍박과 고통과 어려움을 당한 사람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오늘까지 이기게 하신 주님께 그저 감사할 따릅니다.

주님이 역사하신 지난날을 돌아보면, ‘앞으로 어디 간들 안 건져 주시랴’ 하는 믿음을 확실히 갖게 됩니다. 믿음은 첫 발을 내딛기 어렵지, 일단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 증거를 확실히 가지면, 그다음부터는 으레 그렇게 될 줄로 믿고 행동하게 됩니다.

사모하는 자에게 가하는 핍박은 ‘종이호랑이’와 같습니다. 하지만 핍박을 두려워하면 이미 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신앙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믿지 않는 자들’과 ‘두려워하는 자들’은 둘째 사망에 참예한다고 말했습니다. 핍박과 매질과 죽음을 두려워할수록 핍박하는 자는 재미있어합니다. 두려워하다 결국 믿음에서 떨어질 것을 아니까요.

매질과 핍박과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악한 마귀역사도 어찌 해볼 수 없습니다. 마귀역사도 어쩌지 못하는 사람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입니다. 왜 핍박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을까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기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위협이 와도 기쁜 것입니다. 예배하는 것이 목적이요, 충성하는 것이 목적이요, 감사하는 것이 목적이요, 기도하는 것이 목적이기에 그 목적만 달성하면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 없는 사람이 제일 용감한 사람입니다.


믿음의 상사점에서 승리하기를
영적생활에서 지면 큰일 납니다. 반드시 고난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주님 오실 때는 믿는 자가 믿는 자를 핍박하고 죽음에 내어 준다고 했습니다(마24:9~10). 그때 이기려면, 나를 죽음에 내어 주는 그를 불쌍히 여겨야 하고,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기보다 차라리 죽기를 각오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재물보다, 목숨보다, 자존심보다, 자아보다, 지식보다, 어떤 환경보다, 그 무엇보다 믿음을 위에 두어야 모든 걸 빼앗겨도 이길 수 있습니다. 믿음을 최상의 가치로 여겨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께서 건지십니다. 그래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 예배드리지 않고는 못 사는 사람, 감사하지 않고는 못 있는 사람, 전도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사람, 충성하지 않고는 좀이 쑤시는 사람,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숨 쉴 수 없는 사람,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고는 못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이 있어야 고난과 핍박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달라고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464호> 기사입니다.


    아이디 로그인

    아이디 회원가입을 하시겠습니까?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이디/비번 찾기

    소셜 로그인

    연세광장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