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하는 예배(47)] 신앙생활에 승리케 하는 절제의 능력

등록날짜 [ 2017-04-13 16:22:37 ]

*주제: 경건
*찬송: 351장 ‘날 대속하신 예수께’
*본문: 디모데후서 3장 1~5절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그리스도인에게 ‘절제’란 일반적인 감정조절 그 이상의 것이 요구되는 수준 높은 영적 능력입니다. 어둠의 주관자인 마귀역사는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절제하지 못하게 합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인격적으로 점잖던 사람도 마귀가 예기치 못한 환경의 변화를 일으키고 감정을 변화시키면 순식간에 절제의 능력을 상실한 채 온갖 혈기와 짜증을 내고 맙니다. 그래서 ‘절제하라’는 말은 곧 마귀역사와의 싸움에서 ‘이기라’는 말입니다.

또 절제는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적정한 상태를 말합니다. 넘치는 것은 제하고, 모자란 것은 내 안에 계신 성령께 의지해 그분의 공급하심으로 더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령한 기준에 맞추어 조절하는 삶이 절제하는 삶입니다. 넘치고 모자란 정도의 기준은 당연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절제하는 삶은 나의 처한 상황이나 체면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하는 삶이며, 그 말씀의 기준대로 살려면 무엇보다 성령께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절제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하나인 이유가 그것입니다(갈5:22~23).

그런데 우리는 절제하되 잘못 절제할 때가 잦습니다. 받아들여야 할 하나님의 뜻은 절제하고,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세상 것들은 쉽게 수용한다는 말입니다. 절제해야 할 육신의 소욕은 절제 못 하고, 절제하면 안 될 성령의 소욕은 절제하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성령의 감동은 내게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고 하나님과 반대되는 이념은 무조건 절제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성공과 실패가 여기에 달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수용(受容)하고 배타(排他)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배타해야 할 뱀의 말을 수용하고, 수용해야 할 하나님 말씀 곧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배타했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노아는 그 시대 사람들의 야유와 불신앙의 말을 배타하고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 말씀만 수용하였기에 홍수로 내린 심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 말씀과 마귀역사를 분별하여 수용과 배타를 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수용하고 배타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지만 그와 함께 그 결과에 따라 엄중한 책임을 묻는 심판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배타할 것은 과감히 배타할 수 있는 절제의 능력을 키워 신앙생활에 승리해야 합니다.


■기도: 주여,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수용할 것은 무제한 수용하게 하시고 배타하고 절제할 것은 제한 없이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신앙생활에 승리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누구나 함께하는 예배』
윤석전 목사 저

위 글은 교회신문 <52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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