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 믿음의 사람들] 교육의 횃불 든 목회자, 허담 목사
침례교 믿음의 사람들 <24> 허담 목사

등록날짜 [ 2010-05-03 13:16:03 ]

일제 탄압과 6.25전쟁에도 교육에 전력…
후학 양성 위해 생애 바쳐

허담 목사는 1886년 8월 7일 경북 영일군 송라면 조사리에서 허씨의 9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자란 허담은 다른 어린이들과 같이 서당에 다니면서 한학을 공부했다. 당시 신학문이 들어와 젊은이들은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갔다. 허담도 22세 되던 1908년에 일본 동경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2년간 공부했다. 귀국하면서 침례교회에서 교회생활을 시작했다. 교회생활을 하면서 박병식, 이명서 등과 함께 고향에 교회를 세우자고 의견을 모으고 먼저 이명서의 집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1911년 펜윅 선교사가 충남 공주에서 개최한 제6회 대화회에서 총찰(개척 전도인들의 책임자로 전도 보고서를 책임졌다)의 직분을 받고 강원도 울진구역에서 순회 전도인으로 사역했다. 1912년 펜윅 선교사가 경상북도 산점에서 개최한 대화회에서 전치규, 안대벽 등과 함께 교사 직분을 받았다.

독립만세 사건과 허 교사
1919년 3.1 운동이 전국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전 국민이 맨손으로 독립을 위해 봉기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전국에 있는 교회는 독립만세 사건에 앞장섰다. 상해에서는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립의 염원을 세계에 알렸다. 일본의 동경에서도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2.8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계속했다.

허담교사는 고향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독립만세를 외치며 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있을 때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형무소에 갇혔다. 복역을 마치고 출옥한 그는 장로교 전도사로 임명돼 인근 마을을 돌며 하나님의 복음을 열심히 전했다.

1920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4년간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하고 1924년 신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25년간 하나님 앞에서 목회자로 사역하였다. 1926년 경주에 있는 계남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교육계에서 봉사하기도 했다.

1945년 조국이 광복을 맞게 되자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허담 목사는 경주 문화교육재단을 설립하고 문화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후학들의 교육에 전력을 기울였다.

침례교와 허 목사
조국은 해방되었으나 38선이 가로 막히며 남북이 갈라지더니 급기야는 1950년에 북한의 공산당이 남침을 감행하면서 삼천리강산은 피로 물들었다. 연합군의 참전으로 9.28 서울이 수복되었고, 이후 지리한 전쟁은 2년 더 지속된 후 38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허담 목사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보면서 영혼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1951년 경주시에 동경침례교회(현 경주침례교회)를 개척한다.

당시 침례 교단은 일본의 박해와 전쟁으로 문을 닫았던 교회를 다시 수습하고 미국 남침례교와 제휴를 맺고 선교사역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다. 교단은 세계 침례교에 가입하면서 많은 선교사들이 내한하고 있었다. 허담 목사는 과거와 같이 복음 전선에서 일하던 동역자들을 만나 기쁨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다.

1956년에는 한국 침례회 총회에서 교육부장을 맡아 봉사했다. 그해에 침례교단은 국제적인 교류가 활발했는데 아시아 침례회 청년대회에 김인영, 김광택, 김한희 등을 파송하였다.

미국 남침례교 총회는 주일학교 교육부장인 하우스 박사와 텍사스 주 총회 주일학교 부장 알렌 박사가 한국 침례회 주일학교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내한했다. 같은 해에 세계 침례회 부인회 총회장이며 미국 남침례교 부인회 회장인 말탄 여사가 내한하여 우리 교단과 친교를 하였다. 세계 침례회 연맹 총회장인 아담스 박사 부부와 같은 기관에서 일하고 있던 대니 시 등 침례교 지도자들이 대거 내한하여 친교를 더욱 두텁게 했다.

미국 워싱톤에서 개최된 세계침례교 대회에 한국 대표로 안대벽 목사 부부가 참석하여 한국의 침례회를 소개하는 등 활발한 교류와 활동이 1956년 그해에 있었다.

허담 목사는 1957년 침례신학교 교무과장으로 신학교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후에 부교장으로 승진하여 후학들 양성에 힘을 기울이며 하나님 앞에 봉사하다가 은퇴하여 고향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주님의 품에 잠들었다.

자료출처 『한국 침례교 인물사』

위 글은 교회신문 <19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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