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회계연도를 시작하며] 예수로 얻은 구원의 큰 영광을 위하여!
등록날짜 [ 2010-09-01 07:28:09 ]
27세에 선교사 임명받아 한국으로 파송
월간 <성광> 발간, 여선교회 지도자 양성
왕은신 선교사는 1928년 2월 21일 미국 중서부지역 미주 리캐스 카운티에서 로스 와그너 안수집사 2남 1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난 왕은신은 부모님이 섬기는 교회에 출석하며 믿음을 키웠다. 신앙이 독실했던 부모의 헌신적인 신앙생활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39년 왕은신이 11세 되던 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12세 되던 1940년에 젊은 전도자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믿음을 고백한 왕은신은 모든 삶을 주님께 드리기로 다짐했다.
이때 부친은 “주님께 헌신한 너를 보니 참으로 기쁘다”고 하며 즐거워했다. 왕은신은 조상들이 대대로 지켜온 농장 안에 있는 연못에서 여러 교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침례를 받았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다닐 때 아버지마저 왕은신의 곁을 떠나 하나님 나라에 가고 말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주리 주립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생활은 신앙생활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신앙이 더욱 돈독해지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사명을 받게 되었다.
학교에서 진행하는 선교 강좌에는 빠짐없이 참석하면서 선교사로서의 자질을 키웠다. 특히 한국에 파송된 예정인 부래넘 선생의 강의는 늘 그녀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때 켄터키 루이빌의 여전도회 훈련학교에서 영적 지도자들과 교제하면서 자신이 해외 선교사로 부름 받았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왕은신은 공개석상에서 선교사로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 헌신하겠다고 서원했다. 이때 한국 유학생 노영하와 노영구 두 여학생을 알게 되었다. 이들을 통해 한국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게 되었으며 한국에 선교사로 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전국여선교연합회에 헌신
1955년 3월 미국 남침례교 해외선교부로부터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한국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첫째 조건인 언어 습득을 하기 위해 정규 과정을 이수했다. 왕은신 선교사는 한국교회에 선교사로 파송되면서 여선교회를 위해 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독교 한국침례회 전국여선교연합회는 1954년에 조직되었는데, 이때 이순도, 방효성, 라이트 선교사가 여선교회를 맡아 일하고 있었다.
한국에 파송된 왕은신 선교사는 여선교회의 활성화를 위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개교회를 방문하여 여선교회를 조직하고 이들을 격려했다. 1959년 월간지 <성광>을 발간하여 여선교회 사업을 모든 교회에 알렸다. 여선교회가 전국교회에서 활성화되면서 산하 기관으로 소녀회(GA)를 조직하여 초창기에 파송되어 사역하던 루비 휫(Ruby Wheat)선교사와 함께 일했다.
왕 선교사는 여선교회를 잘 이끌어갈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회원들을 위한 교육에 몰두했다. 이때 교육을 받은 김한희, 윤옥석, 구난서, 이치강, 조혜도, 한정희 등은 이후 여전도회를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36년간 한국에서 사역
여성이라면 누구나 이상적이고 행복한 가정을 꿈꾼다. 그러나 왕 선교사는 오직 주님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사느라 가정을 꾸리지 않았다. 꽃다운 젊음은 물론 36년간의 긴 세월을 한국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섬김의 세월로 보냈다.
침례교 여선교연합회의 위상을 높이는 데는 왕 선교사의 헌신적인 노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왕 선교사는 평소 선교를 위한 다섯 가지 지침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기도이며, 둘째는 성경과 선교에 대한 공부, 셋째는 복음을 전하는 일, 넷째는 청지기 직분, 다섯째는 아동과 청소년 양육이었다.
왕 선교사는 이 일들이 우리가 해야 할 책임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36년 동안 한국 땅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사역한 왕 선교사는 평소에 손님을 대접하는 일을 매우 즐겁게 여겼다. 늘 근검절약하는 겸손한 생활을 했으며 훌쩍 큰 키로 성큼성큼 사람들에게 다가가 친절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여선교회를 위해 일한 그녀는 얼굴에 늘 미소가 떠나지 않았던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자료출처 『한국침례교인물사』
위 글은 교회신문 <20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