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기독교선교교회연합회 취약계층에 쌀 700포대 전달
“이웃 영혼 주님처럼 섬기겠습니다”
등록날짜 [ 2011-01-27 10:11:19 ]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한 말로 사용했다. 사무엘 즈웨머가 모슬렘들을 위한 사역을 하려고 바레인 거리를 걸어갈 때면 종종 “‘당신은 기도하십니까?’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는 놀림을 당했다. 그런 놀림을 받게 된 것은 널리 배포된 ‘당신은 기도하십니까?’라는 제목으로 된 조그만 전도지를 그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즈웨머는 기도에 관한 전도지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변화하는 일을 돕도록 이 지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을 사용하셨다.
그는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개혁교회 목사의 열다섯 자녀 중 열세 번째로 태어난 그는 살아남은 나머지 네 명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따라 그리스도인 사역자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처음부터 즈웨머는 편하게 살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는 아랍 모슬렘들을 위해 일했으며 선교 역사가 그를 칭하듯이 그 사역을 통해 ‘이슬람의 사도’가 되었다. 그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었다. 모슬렘 사역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생각하던 개혁선교부에 거절을 당한 그는 급우인 제임스 캔틴과 팀을 이루어 배를 탈 수 있을 만큼 돈이 모여질 때까지 서로 상대방을 위한 모금을 하면서 선교를 시작했다.
“목회자들의 무감각이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다”고 그는 썼다. 그러나 그를 괴롭힌 것은 그 무감각만이 아니었다. 형식주의 역시 그를 괴롭히는 골칫거리였다. 주일 설교를 하도록 허락해주는 교회들은 있었지만, 모슬렘들이 집중적으로 모인 곳을 보여주는 그가 만든 도표를 걸게 해주는 교회는 없었다.
1890년 아랍을 향해 출항한 즈웨머는 오늘날 주요 석유 생산지인 페르시아 만에 있는 바레인 작은 섬에 정착했다. 거기서 그는 5년이라는 긴 세월을 혼자 땀 흘렸다. 그러다가 1885년, 그의 친구이자 동역자가 되어 준 아름다운 간호사 출신 선교사 에이미 윌키즈를 만나 결혼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그의 삶은 낭만을 즐기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려운 언어와 씨름했을 뿐 아니라 외로움과 고통을 견뎌내야 했다. 1904년, 4세와 7세인 어린 두 딸이 이틀 만에 차례로 눈을 감았다. 그러나 모슬렘이 아닌 이방인들의 몸으로 땅을 더럽힐 수 없다고 주장하는 지방 관리들 때문에 한동안 아이들을 묻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손수 작은 무덤을 파고 두 딸을 묻어야만 했다.
즈웨머는 드디어 그의 탁월한 지성으로 대학가 젊은 청년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카이로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모슬렘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그런 위대한 전도자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단지 10여 명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심어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때까지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했다. 이슬람과 논쟁에 맞섰고, 전 세계 이슬람권에 영향을 미치도록 교회들을 깨우는 일을 시작했다. 그는 집회에서 강의했으며, 거액의 후원금을 모금했고, 그리스도인들의 좁은 시야에 도전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지 못하는 이슬람권에 사는 수많은 사람을 생각하도록 촉구하면서 전 세계를 다녔다.
위 글은 교회신문 <227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