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콤 펜윅 한국 교회 전도기 <19>] 미신에 붙잡힌 사람들을 믿음으로 잠재우다

등록날짜 [ 2011-03-23 17:23:46 ]

평소 친절하나 병자에게는 냉혹한 한국인들
아편 중독자 가족 병으로 죽자 불안에 떨어

한국에서는 나그네를 맞아들인 다음 그가 병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가련한 그를 거리로 내쫓는다. 그만큼 죽음을 두려워하고 미신에 꽉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 소식은 마을에 퍼지고, 마을 사람들은 자기 마을에서 객사한 사람 때문에 액운이 닥칠까봐 두려워서 제비를 뽑아 걸린 사람에게 병자를 업게 한 다음 인근 마을로 간다. 그러고는 들켜서 큰 싸움이 나지 않도록 몰래 버리고 도망친다.

그 마을 사람이 병자를 발견하면 그 마을 역시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이렇게 해서 병자는 밥도 물도 먹지 못한 채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옮겨 다니다가 결국 죽는다. 나도 그런 경위를 거쳐 동구 밖에서 얼어 죽은 사람을 본 적이 있다.

한때 아편 중독자였던 사람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가정에 들어왔을 때, 마을 사람들은 귀신들이 그를 쫓아다니며 식구들을 죽일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을 입증하기나 하듯 얼마 안 있어 그의 할머니가 죽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큰 굿을 벌여 귀신들을 달래라고 재촉했다.

그는 거절했다. 마을 사람들의 태도는 단호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는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라도 자기 백성을 넉넉히 건질 능력이 있으신 분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편 중독자를 구출할 만한 믿음을 가진 전도자 김 선생을 즉시 그에게 보내셨다. 김 선생은 딱한 처지에 놓인 그를 위로하고 격려했으며, 그 지방에서 최초로 기독교식 장례로 죽은 할머니 상(喪)을 치러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큰 불안에 휩싸였다. 귀신들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을 입증이나 하듯 그의 어린 자녀 중 둘이 악성 열병에 걸려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귀신들이 자네 식구를 전부 죽일 거라고 말하지 않았나? 이번에는 귀신을 달래는 식으로 장례를 치러야만 하네” 하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겠소. 나는 예수식 장례를 치를 거요”라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하지만 아이들이 죽는 걸 보지 않았나?”라고 말해도 그는 “나는 아이들이 죽기 전에 예수에 관해서 들은 걸 참 기쁘게 생각합니다. 구주를 모른 채 죽었더라면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을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번에도 김 선생은 그를 위로하였다.

그 일이 있고 난 지 얼마 안 된 어느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 포졸 둘이 예배당에 찾아와 집회 책임자가 누군지를 물었다. “내가 책임자요” 하고 김 선생이 말했더니, 포졸들은 “그래? 당신이 마을을 떠나 줘야겠소”라고 말했다. 김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그럴 수 없소. 내 주님이 나를 이곳에 보내셨으므로 내 마음대로 떠날 수 없소. 당신들이 나를 쫓아낼 권위가 있다면 그 권위를 행사하시오. 난 떠날 수 없소.” 포졸들은 그를 덮쳐 때리고 옷을 찢고 갓을 밟고 책들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갔다. 형제 몇이 내게 편지로 전도자가 겪은 시련을 알려왔다.

김 선생 자신이 쓴 편지도 그들의 편지와 동시에 도착했는데, 김 선생은 그 곤경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전도자들을 좀 더 많이 보내 주십시오”라고만 썼을 뿐이다.

그런 그가 병에 걸렸다. 소모성 질환의 일종이었다. 병세는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쉰 살 먹은 고결한 분으로서, 참으로 많은 희생을 감내한 분이었다. 그때 지난날 그 아편 중독자가 서점으로 내려가 그 죽어 가는 사람에게 “이곳은 불편하니 나와 함께 집으로 갑시다” 하고 말했다. 그런 뒤 그를 집으로 데려가 그 형제가 죽어 천국에 갈 때까지 좋은 대접을 하고 마치 그를 부모처럼 간호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죽자 예수식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리스도를 발견한 뒤 자기 집에서 치른 네 번째 장례였다.

원산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남부 지방에서 사경회를 열기로 했다. 며칠에 걸쳐 사경회를 은혜롭게 마친 뒤 전도자 오십 인을 세워 파송하였는데, 그 중 아홉 명은 두만강 지역을 맡았다. 그들은 안락한 가정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고향을 흔쾌히 떠났다. 한국인에게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백인이 고향을 떠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고생을 뜻한다.  헌신적인 이 전도자들은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 열 달 만에 교인 수가 평균 45명이 되는 건실한 교회 10개를 이 지역에 세웠다.

백인 선교사 아홉 명을 뉴욕이나 런던에서 두만강까지 보냈다면 3000달러가 들었을 것이다. 사역지에 도착했더라도 여러 해 동안 사역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가 되었을 것이고, 기껏해야 한두 명 정도가 쓸모 있는 종이 되었을 것이다. 일부는 죽고, 일부는 병에 걸리고, 일부는 주변 상황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백인 선교사 9명에게 언어와 관습 등을 가르치는 선교 교육을 했다면 4만 5000달러 이상이 들었을 것이다. 케리(Carey) 같은 위대한 선교사도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 한 사람의 개종자를 얻는 데 15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이제 다음과 같은 기막힌 사실들을 들어보라. 나는 산을 넘어 마을을 지날 때면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에 관해 들어 봤느냐고 물어보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한결같이 “아니오, 예수가 누구요?”라고 반문했다. “한국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있는 줄을 모르신다고요? 침례 받은 한국인들이 15만 명이 넘는 데도요?”라고 말하면 그들은 “아니오, 들어 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한국 대부분 지역이 철저히 미전도 지역이다. <계속>
『한국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말콤 펜윅 저)』에서 발췌

위 글은 교회신문 <23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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