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쓰신 사람들] 존 후스 (John Huss)
종교개혁을 주장하다 화형당해

등록날짜 [ 2011-04-29 16:05:34 ]

  
프라하에 있는 베들레헴 교회를 방문하면, 존 후스의 집과 그가 설교하던 교회가 있다. 아직도 베들레헴 교회에 남아 있는 그의 자취를 보려고 아이들이 종종 방문하기도 한다. 오늘날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챔피언으로서 영웅이 된 체코슬로바키아 사람이지만, 그 당시에는 기존 로마 가톨릭에 도전한 논쟁적인 사제였다.
그는 현재 체코슬로바키아의 한 부분이 된 보헤미아 어느 농가에서 출생했다. 그는 프라하 대학교에서 신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고 강의했으며, 1402년에 사제로 안수받고 대학 학장이 되었다.

진보적 사고의 소유자인 후스는 ‘교회에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영국에서 존 위클리프가 시골 사람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을 때, 존 후스는 자신이 섬기는 프라하 사람들에게도 성경을 번역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후스는 위클리프의 글을 번역해 그 중 어떤 것들은 자신의 열띤 설교에 사용했는데, 그 설교는 듣는 이들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프라하에는 후스가 설교를 작성하던 책상이 아직도 남아 있다. 후스의 설교를 읽어 보면, 마치 그가 오늘날에 살고 있는 사람처럼 우리의 당면한 문제들을 어쩌면 그렇게 잘 알고 있는지 의아할 정도다.

새로운 교황을 뽑는 1378년에 열린 교황 선거에서 두 사람이 합법적인 교황(아비뇽 유수 이후 가톨릭 교회는 로마와 아비뇽의 교황, 두 교황을 동시에 모시는 분열 상태에 빠져 있었음)이라는 주장을 한 이후, ‘충성스러운 로마 가톨릭교도’였던 후스는 마음이 불편했다. 그 후 1409년 또 다른 사람이 교황 자리를 주장했다. 세 사람 모두 마치 근접한 표 차이로 경쟁을 벌이는 정치가들처럼 서로 헐뜯었다. 그런 그들에게 후스는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흔들림 없이 믿었고,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주었다. 후스에게 적이 많이 생기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권력자들이 그를 위협했고, 성직자들은 그를 이단으로 몰아붙였으며, 그의 가르침을 비난했다.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은 그들이 좋아하는 후스를 중심으로 모였다.

교회와 국가 간의 싸움이었고 국가는 패했다. 후스는 자신의 가르침을 설명하고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비난에서 자신을 변호해주도록 보헤미아의 왕 벤체슬라스와 황제와 교황에게 안전을 보장해줄 것을 약속받고, 콘스탄츠 공의회에 소환되어 갔다.
그러나 안전을 보장한다는 약속은 온데간데없고 공의회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415년 그는 성당 밖으로 끌려나가 화형을 당했다.

자신이 확신하는 것을 지키고자 생명을 건 희생을 기꺼이 감수한 존 후스와 같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진 은혜의 빚은 엄청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후스와 같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지키고자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을 더 보내주시기를 바란다. 우리에게는 영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용기가 필요하다. 몸을 떠나 본향에서 주님과 함께 있을 존 후스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23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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