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기독교선교교회연합회 취약계층에 쌀 700포대 전달
“이웃 영혼 주님처럼 섬기겠습니다”
등록날짜 [ 2011-08-30 19:34:00 ]
허드슨 테일러는 여러 면에서 매우 평범한 사람이었다. 조용했고, 목소리도 크지 않았다. 동정심을 지니고 있었으나 뛰어난 외적 카리스마나 역동적인 리더십을 발휘하지도 않았고, 그저 뚝심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놀라운 믿음과 기도와 헌신의 사람이었고, 그가 적응하고 사랑한 나라에 대해서는 지칠 줄 모르는 끈기를 가진 불굴의 사람이었다.
1932년 그가 태어나기 전 그의 부모는 “하나님, 우리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라면 그 아이가 중국에서 당신을 위해 일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했다. 12년 후 테일러의 집에서는 평신도 설교자인 그의 아버지를 중심으로, 중국 전역에 열 명도 안 되는 개신교도들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개탄하는 토론이 벌어졌다. 통렬한 비난을 들으면서 어린 허드슨은 곧바로 “내가 어른이 되면 선교사가 되어서 중국으로 가겠어요!” 하고 말했다.
당시 허드슨은 병약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이 아이가 외국에 간다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허드슨 테일러의 전기를 쓴 J. C. 폴락도 아들이 중국에 가도록 기도는 했지만, 그 여건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며 허드슨 아버지의 마음을 대변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뛰어난 교육과 문화, 또 사회적 지위를 지닌 사람들조차 절대 하지 못하는 일에 테일러의 뚝심을 사용하셨다. 17세에 회심한 테일러는 선교 사역을 준비했다. 그리고 중국 상하이와 닝포에서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6년 동안 사역했다.
테일러가 남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틀에 박힌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선교사 대부분이 하인을 부리고 차 시간을 즐기며, 영국이나 미국에서 누린 생활과 별다를 바 없이 사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문화적인 차이가 장애가 된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자신의 머리털을 잘라내고 남은 머리 타래를 땋아 내렸다. 또 머리에는 물을 들였는데 어떤 때는 그가 사용한 잿물 그릇이 깨져서 그 화기에 얼굴을 데어 상당한 고통이 따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중국인의 옷을 입었다.
그래도 여전히 자신과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느낀 그는 영국으로 돌아가 자신의 선교부-중국 내지 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를 조직한 후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중국인들에게 전도하는 일에 헌신하겠다고 다짐한 선교사들과 함께 1866년 중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수많은 대가를 지급해야 했다. 그는 “내게 1000파운드가 있으면 중국인들도 그만큼 가져야 한다. 내게 1000명이 있다면 중국인들도 그만큼 있어야 한다. 아니다! 중국인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가지셔야 한다” 하고 썼다. 그런 다음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가 너무 많은 일을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 겸손히 물었다.
어려움이 닥칠 때, 그는 언제나 그가 사랑하는 주님을 피난처 삼았다. 모든 필요를 위해, 그것이 재정적이든 추수할 일꾼에 관한 것이든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했다. 그는 동료에게 종종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부족하지 않게 모든 필요를 공급해주실 것이다” 하고 말하곤 했다.
1900년 6월, 북경에서 모든 외국인을 죽이라는 황제의 명령이 떨어졌고 그 결과 테일러의 선교부에 속한 선교사 153명과 자녀 53명 대부분이 죽임을 당하는 무자비한 일이 벌어졌다. 이 큰 손실로 테일러는 완전히 회복할 수 없게 되었지만, 중국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든든히 세웠다. 그 십자가는 의화단운동 속에서도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반세기 후에 일어난 공산주의의 맹렬한 공격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위 글은 교회신문 <255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