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그의 생애와 업적(29)] 30년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
이승만의 환국, 그 우여곡절

등록날짜 [ 2013-08-20 17:15:53 ]

좌파세력은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대하고 이용하려 하는데…

당시 미국에서 한국에 가려면 배로 한 달 정도 걸렸다. 이승만은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다. 하지만 해방 후 두 달 만에야 한국 땅을 밟았다. 비행기를 탔으나 배를 타고 오는 시간보다 두 배나 더 걸린 셈이다. 이승만이 겪은 파란만장한 망명 생활처럼 귀국하는 과정 역시 우여곡절이 많았다.

미국 국무부는 이승만을 골치 아프게 여겨 여권 발급을 거부했다. 그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가며 이승만이 귀국하는 길을 막았다. 사실 미 국무부가 예상한 일은 맞아떨어졌다. 귀국한 이승만이 계속해서 미국 관료들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귀국 자체가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낙심에 빠졌을 때, 갑자기 모든 문제가 한 번에 해결되었다. 어떻게 귀국할 수 있었을까? 이승만이 귀국하는 일에는 두 가지 우연이 겹쳤다.

하나는 하지와 윌리엄스 중령의 만남이다.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한 하지 장군은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를 구사하는 윌리엄스 해군 중령을 우연히 발견했다. 한국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던 하지는 윌리엄스를 반기며 그 자리에서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했다.

윌리엄스는 서울 중앙청에서 하지가 담당한 업무를 보좌했다. 그는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책상에서 보고서나 만지작거리는 관료가 아니라, 한국인들을 직접 만나 민심을 파악했다. 쌍발 비행기를 타고 대전, 광주, 대구, 부산 등 남한 일대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한국 서민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윌리엄스는 한국인들에게 거듭거듭 똑같은 질문을 받았다. “왜 우리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데려오지 않는가?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 있다고 하는데 왜 데려오지 않는가?”라는 물음이었다. 윌리엄스는 자신이 전해 들은 민심을 하지에게 보고했다.

하지는 혼돈 상태인 정국을 수습하고자 이승만을 보내달라고 맥아더와 미국 정부에 요청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이승만이 임시 정부 대통령으로 유명했다고는 하지만, 한국을 떠난 지 30여 년이 지났다. 더군다나 나이 70세로 고령이었다. 평균 연령이 40세 전후이던 당시 상황에서 보면, 일제 치하에서 이승만이 활약한 업적을 기억하는 이들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물론 지도자들은 이승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름 없는 한국인들도 이승만을 거론했다는 점은 무언가 특이하다. 어떻게 윌리엄스가 가는 곳마다 한국인들이 이승만을 보내라고 요청했을까?

여기에 우연이 또 하나 겹친다. 그 우연을 만들어낸 세력은 놀랍게도 공산주의자들이었다. 8.15 광복에서 이승만이 귀국하는 10월 16일까지를 학계에서는 ‘좌익 득세기’라고 부른다. 해방 공간을 주도한 세력이 좌파였기 때문이다. 해방과 함께 온건 좌파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 건국 준비위원회(건준)가 발족했다. 다음 날에는 전국 교도소에서 정치범 수천 명을 석방했다. 풀려난 시국 사범들은 지방 조직을 차례로 건설했다. 순식간에 건준은 지부 162개로 확장했다.

건준이 세력 확장에 박차를 가하던 8월 20일, 광주 벽돌 공장에 숨어 있던 인물이 서울로 올라왔다. 훗날 한반도에 파란을 몰고 온 공산주의자 박헌영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박헌영은 공산당 활동을 하다가 옥에 갇혔다.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났으나 석방 사유가 특이하다. 공산당에서 전향했거나 혐의가 없어서가 아니라 정신병자라는 이유였다.

박헌영은 몇 달씩이나 자기가 배설한 인분을 먹어가며 정신병자 행세를 했다. 혁명 과업을 달성하고자 인분을, 더구나 몇 달씩이나 먹어낼 만큼 대단한 인물이었다. 박헌영은 서울에서 조선 공산당 재건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건준을 장악해버린다.

박헌영이 장악한 건준은 9월 6일 조선 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했다. 그런데 공산당이 선포한 인민공화국 주석으로 미국에서 돌아오지 않은, 돌아오는 일 자체가 불투명한 이승만을 추대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공산당은 이승만을 얼굴마담으로 이용하려는 전술을 폈다.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그때까지 귀국하지 않던 김구를 내무부 장관으로 발표한 결정도 같은 술책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장관 자리에 국내외 명망가들을 앞세우고 차관에 공산주의자들을 포진했다.

일반 대중에게는 그때까지 좌익도 없었고 우익도 없었다. 그저 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는 뉴스를 보도하니, 인민공화국이 우리나라에 들어설 새로운 정부이고 이승만은 새 대통령이라고 여겼다. 덕분에 일반 대중도 이승만 이름을 들어서 윌리엄스에게 이승만을 귀국하게 하라고 재촉했다.

결국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이 벌인 일로 말미암아 한국에 돌아왔지만, 당연히 인민공화국 주석 제의를 거절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5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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