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강력한 울타리 안에 머물러야
윤석전 목사 5월 10일(주일) 4부 저녁예배 ‘예수와 함께하라’는 설교를 듣고 나서

등록날짜 [ 2015-06-10 10:56:56 ]

구원은 하나님 아들 예수께서 죽으신 엄청난 대가로 이룬 것

값없이 받은 사랑을 바로 알고 예수 안에서 참자유를 누리자

 

 

아래 기고는 윤석전 목사가 5월 10일(주일) 4부 저녁예배에서 설교한 내용에 관해 은혜받은 부분을 실은 내용입니다. <편집자>



예수께서는 열병 든 베드로의 장모와 수많은 병든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서를 인용한 말씀은 예수님의 치유 의미를 드러내어 주면서 동시에 복음의 의미를 뚜렷하게 설명해 줍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과 좋은 소식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사람들의 귀에 참으로 기쁜 소식이며 복음입니다.

 

그러나 그 복음은 예수께서 인류의 죗값인 사망을 대신 담당하시고, 짊어지신 십자가의 피 흘림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그냥 주어지는 공짜이지만, 그 공짜를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몸소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짊어지셨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그의 아드님, 예수님의 혹독한 대가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공짜처럼 보여도 공짜가 아닌 것

 

우리나라에서 대학에 입학하려면 반드시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해야만 합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 돈을 내고 대학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이른바 기여입학제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아버지가 돈이 많아 대학에 기부하면 그 아들을 대학에 입학시켜 주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돈이 많으면 아들이 공부를 못해도 아버지 돈으로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일례로 미국의 전 대통령인 아버지 부시가 엄청난 돈을 예일대학에 기부해서 아들 부시가 유명한 예일대학을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아들 부시는 공부를 잘하지 못했는데도 공짜로 예일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하게 되었지만, 이는 아버지가 엄청난 돈을 예일대학에 지불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들에겐 공짜지만, 아버지는 엄청난 대가를 치렀습니다. 공짜처럼 보이지만 공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와 많은 사람을 질병에서 치유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병을 고쳐 주고 돈을 받지도 대가를 치르라고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밥 한 그릇도 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완전히 공짜로 고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를 복음이라고 일컫습니다. 복음의 본질은 다름 아닌 공짜로, 은혜로 주어지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공짜와 은혜의 배후에는 예수님이 친히 그의 어깨에 우리의 죄와 질병을 짊어지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셨다는 사실을 놓칠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이 우리의 아픔과 상처를 담당하셨기에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복음의 사실을 더욱더 극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는(예수님은)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사53:4~10).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복음 자체가 되셨고, 복음을 선포하셨고,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복음은 내가 병에서 나음을 입었고, 기쁨을 갖게 되었고, 허물이 벗어졌고, 상함이 나았고, 평화를 누리고, 죄악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아 믿고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중요한 사실은 내가 질병에서 나음을 입고, 죄에서 구원의 기쁨을 갖게 되었고, 죄 아래서 받을 징계에서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고통당할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나의 병을 짊어지시려고 채찍에 대신 맞으셨고, 아픔을 친히 지시고 슬픔을 당하셨고, 피 흘려 십자가에서 죽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창에 찔리지 않았다면 내가 그렇게 당해야 했었고, 예수님이 그렇게 처참하게 징계를 당하지 않으셨다면 내가 바로 그 자리에서 처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나의 죄악을 예수님이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셨기 때문에 나는 무죄한 자로 의롭고 떳떳하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이 우리의 의로움으로 전가(轉嫁)돼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서정(序程, 순서)에 우리가 보탤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은혜로만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복음이라고 칭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는데 공짜로 품삯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일해서 대가를 받는다면 그것은 마땅히 지급해야 할 당연한 품삯이지 은혜가 아니며 또한 복음도 아닙니다(롬4:4~6). 그러나 아무 공로 없으나 하나님이 온전하게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대가 없이 거저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쁨의 공짜 복음을 마련하시기 위해서 아들, 예수님을 끌어다가 우리가 마땅히 당해야 할 고통과 슬픔과 허물과 죄악과 징계와 우리가 맞아야 할 채찍을 뒤집어 씌워서 전가(轉嫁)함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공짜로 나음을 입었지만 실은 공짜가 아니라 엄청난 대가를 치르신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에는 용납하기 어려운 잘못된 가르침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공짜로 구원을 받고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거부하고 사람들의 공로에 힘입거나 가톨릭교회 각종 예식에 참여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분명히 예수로 주신 복음에서 벗어난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과 사람의 공로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사람이 자랑거리로 내세우는 그들의 공로와 행위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과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톨릭은 하나님의 구원에 인간의 공로와 행위를 덧붙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문제에 천착한 인물이 바로 마르틴 루터(1483~1546)입니다. 루터는 자신이 하나님의 의로움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에 대한 자각 때문에 두려움과 불안과 고통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의로움은 다름 아니라 ‘오직 믿음’(SOLA FIDEI)으로 말미암아 얻는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불의와 질고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전가(imputation)되어 그분이 이를 온통 다 담당하셨고, 그분의 의로움은 또다시 우리의 의로움으로 전가(轉嫁)되었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죄악의 짐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담당하시고, 처절하게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으며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의로움은 우리에게 속죄의 복음이 되어서 이제 우리는 예수의 의로움의 옷을 입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사람의 공로와 행위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들 그리스도로 다 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기쁨의 복음이고 감사의 복음입니까!

 

 

예수 안에서 자녀답게 살자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단지 ‘예수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가리켜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IN CHRIST) 있는 존재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을 예수께 전가(轉嫁)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허물 없는 거룩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로움의 옷을 입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마땅히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갈3:27).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우리의 생애 가운데서 이루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운명은 뒤바뀌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결코 저주가 없고, 죽음도 넘어서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강력한 울타리는 누구도 깨트릴 수 없고, 우리는 그 안에서 자유하고 평안하고 기쁨을 누리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예수와 함께 살아가는 자들의 새 삶은 예수를 닮고, 본받고 희생하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예수 생명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감사한 인생이고, 구원의 은혜에 감격이 넘치는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병제 목사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 기획국장

(미 남침례신학교 목회학 박사/설교학 전공) 
 

위 글은 교회신문 <43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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