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칼럼] 그리스도의 평화

등록날짜 [ 2010-08-25 07:31:55 ]

서로 이해하는 것이 화합의 시작

올해는 한일합방 100년,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 65년, 6.25전쟁 발발 60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 현대사의 굴곡이 켜켜이 의미를 가진 해이기에 과거를 감사하며 미래를 준비하자는 의미에서 ‘한국교회 8.15 대성회’가 열렸다.

이번 대성회는 오늘날 한국사회가 직면한 여러 가지 문제를 기도와 신앙으로 헤쳐나가자는 취지의 모임으로,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희망’이란 주제 아래 열정, 감사, 치유, 화해를 기원하며 100만 성도가 결집했다.

한 번 집회로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묵은 문제들을 단번에 해결할 수야 없겠지만, 이를 기회로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신앙을 회복하고 사회적 책임을 선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 모임을 기획하면서 한국사회의 가장 절박한 문제로 진단한 것은 갈등과 대립이라고 한다. 보수와 진보, 도시와 시골,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내국인과 다문화인 등의 각종 갈등은 사회문제일 뿐 아니라, 교회 내에서도 대립과 분열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회복한다는 것이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화합과 일치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정치와 종교가 아직 분리되지 않았을 때, 종교적 불화가 정치적 혼란을 일으켰던 17세기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1632-1677)는, 종교와 국가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하기 위해서 ‘자유’를 강조한다. 그는 국가의 궁극적인 목적이 사람들을 지배하며 두려움을 미끼로 그들을 억누르고 그들에게서 독립성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며, 이러한 자유로부터, 다중(多衆)들은 안전을 누릴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그는 종교와 국가를 위해서,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을 말할 ‘자유’를 주장한다. 자유가 보장되지 못한 상태에서, 국가도 종교도 그 안전성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그를 비난과 위협에 시달리게 했다.

그러나 화합과 일치를 위해서 ‘자유’를 강조한 그의 주장은 확실히 옳다. 대립과 갈등은 다른 이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삶, 다른 사람들의 주장, 다른 사람들의 존재가 자신의 그것들과 대립할 때, 그것들을 하찮은 것으로, 틀린 것으로, 자신에게 맞추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갈등은 극대화한다. 화합과 일치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뜻을 갖는 것에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담을 허묾으로써 그들을 화해시켰다. 그것은, 그들을 동일화시킨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서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게 했으며, 그들 각자가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을 말할 자유를 서로가 억압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했다. 그 자유로부터, 평화와 화합과 희망이 시작된 것이다.

공들여 만든 모임이 끝났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다. 진정으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희망이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사랑한 그 사람들의 자유, 그들에 대한 용납을 오늘부터 실천해야 한다.

위 글은 교회신문 <20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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