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칼럼] 신학은 교회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등록날짜 [ 2018-07-31 11:54:18 ]

성령·기도·은사 강조하면 보수신학?
반교회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가
영성에 뿌리내린 신학의 균형 붕괴


인격은 교제하는 사람 통해 드러나
성령으로 본성 변화된 ‘바른 인격’이
교회 중심적, 실천적 ‘바른 신학’ 낳아


지난달에 교수로 임용된 지 만 30년이 됐습니다. 수십 년을 직접 겪었던 교육 현장과 수십 년을 앞과 뒤에서 바라보았던 많은 사람을 떠올려봅니다.

교내·외의 교수들과 교제하면서 신학교의 현황과 분위기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주요 관심은 신학의 방향이고 학생들의 교육에 대한 내용입니다. 공감하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대체로 문제를 느끼는 공통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이분법적 사고의 대립·갈등이 심화하면서, 동시에 교회 지도자를 양성하는 신학의 현장에서도 이분법적 정의와 대립 구조의 경향이 증대되는 현실에 대한 문제 인식입니다. 이런 경향이 결국 한국 교회의 미래가 될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신학 공동체 안에서 뚜렷하게 대립하는 현상은 신학의 경향성(傾向性)인데, 이 경향성이 삶으로 표출되면 한 개인의 인격으로 사회화하여 주변에 큰 영향을 줍니다. 이 경향성은 교회 현장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학생 개인의 장래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신학의 경향성은 ‘교회를 위한 신학’이라는 지향점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행전이라는 사도행전의 교회를 재현하고 구현하기 위한 영성에 뿌리내린 신학, 실천하는 신학이라는 균형이 있는 훈련이 신학교에서 실천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간혹 이분법적 대립 구조가 건강한 신학 공동체의 균형을 흔들면서 신학교를 정체성 없는 교육의 장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흔히, 성령·기도·은사 등을 강조하면 시대에 뒤처진 보수주의자라 하고, 교회를 비판하며 사회 정의와 윤리를 강조하면 진보적이라고 간주합니다. 또 보수적이면 신학적이지 않고, 진보적이면 학술적이라고 하는 이분법 구조도 있습니다. 본질적 기본은 소홀히 하고, 본질적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역행하면서, 현재의 삶을 즐기는 태도가 마치 그리스도인의 자유이며 지성인의 삶인 듯 혼동하는 것입니다. 반(反)교회적인 비판과 삶의 정당화가 마치 기독교를 개혁하려는 운동인 것처럼 포장하면서, 소중한 배움과 훈련의 기회를 상실합니다. 균형의 상실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비균형 구조가 되레 비윤리적이며 비인격적인 이중적인 삶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되는 점입니다. 간혹 가르치는 교수나 배우는 학생이 이런 구조 속에서 자신들의 잘못된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이렇게 이분법으로 분리된 사고로 행동하며, 매우 편향적이며 사변적인 신학에 함몰되어 마땅히 수행해야 할 훈련과 교육을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동성애, 동성혼 합법화의 문제에서도 드러납니다. 동성애 반대는 보수적이며, 동성애 찬성이 마치 사람을 이해하는 열린 자세이며 학문적으로 진취적인 태도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내면으로는 동성애를 찬성하면서도 공동체 분위기가 이를 표명하기 곤란하면 침묵합니다. 이런 반교회적인 경향의 신앙과 신학적 편향성이 신학 교육에 영향을 줍니다. 이분법적인 단순 사고의 확장이 영성에 뿌리내린 신학의 균형을 붕괴시킵니다.

신학 교육의 현장에 몸담고 있으면서 인격과 신학의 관계를 생각해봅니다. 한 사람의 신앙과 인격은, 생활 속에서 표출하는 주장이 아니라, 내면의 본성에서부터 표출되는 신앙의 행위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직분이 한 사람의 인격이 아니며, 신앙을 보증해주지 않는 사례도 많이 봅니다. 본질이 변화되지 않은 인격은 파편적인 신학을 생산하며, 반교회적이며 반그리스도인적인 생활을 건강하고 진보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처럼 위장합니다. 사람 사이에 이해관계가 맞물릴 때 그 사람의 인격이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인격을 지성·이성·교양 등으로 포장할 수 있지만, 그 내면의 감추어진 인격은 이해가 걸린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나 사건을 통해서 표출되며, 이해관계를 형성합니다.

한 사람의 인격 지표는 그 주변의 교제하는 사람일 때가 많습니다. 신입생 면접 때부터 졸업 이후의 목회 현장에서, 사람의 본성이 변하는지, 아니면 단지 변화되는 것처럼 보이는지를 살펴보니, 인격은 주변의 교제하는 사람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것을 자주 경험합니다. 주변의 교제하는 친구들의 면면이 결국 그 사람의 인격이며, 이해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는 열두 제자의 울타리를 벗어났습니다. 그 구성에 계속 동참하지 못했던 유다는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습니다(마26:24).

‘바른 신학’은 균형이 있는, 실천하는 신학입니다. 바른 인격이 바른 신학을 낳으며, 인격의 변화는 성령으로 본성의 변화가 이루어질 때 따라옵니다. 신학 현장에서 수십 년을 돌아보니, 먼저 본성의 변화가 있을 때 인격이 변화돼 영성에 뿌리내린 신학을 하여 교회에 유익한 일꾼으로 훈련이 된다는 것을 더욱 실감하고 있습니다. 인격은 관계이며, 변화된 내면의 본성이 표출되는 것입니다. 내주하는 성령에 내 인격이 접붙여 있는 것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고전12:3,13). 로마서에서 유대인의 구원을 설명하는 구절은 우리가 우리의 본성(nature)을 거슬러 예수님께 접붙임 받은 구원의 신비를 다시 일깨워줍니다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nature)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롬11:24).



/김선배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신약학



 

위 글은 교회신문 <58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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