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칼럼] 광야(廣野),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선택의 기로

등록날짜 [ 2019-07-18 13:58:28 ]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육신의 때 가져다줄
세상의 부유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광야의 삶 선택해 영원과 영혼 위해 살아야


한때 세상 사람들은 성경에서 심리학이나 처세술을 배워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연구했다. 상품 판매 전략을 배우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만큼 성경 안에는 역사적 기록이 풍부하고 지혜·정치·거래·인간 이해 등 인간사와 관련된 상세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처럼 이용할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에 이용당하는 것이 성경 앞에 선 자들의 유익이고 참된 모습이다. 성경 앞에서 패배당하고 굴복당하고 주제 파악을 하는 것이다. 성경 말씀은 우리 자신을 초월해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을 발견케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놀라운 자기 인식에 다다르도록 하려고 우리에게 주어졌다.


성경이 그리는 하나님의 세계
20세기 대표적인 신학자 ‘칼 바르트’는 『성경의 새롭고 낯선 세계』에서 “성경이 그리는 세계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전혀 낯선 세계”라며 “성경은 인간의 경험과 학문을 벗어나 하나님께서 그려 주신 세계며,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하나님을 직시하도록 한다”고 말했다.


윤석전 목사님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성경 말씀이 그리고 있는 현실과 이 세상이 그리고 있는 모습은 엄청난 차이가 있어서 누구나 성경의 세계 안에서 살 것인지, TV의 세계 안에서 살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며 “TV가 그려 주는 이 세상은 돈과 경쟁과 쾌락과 탐욕에 매여 맹목적으로 달리기를 하다가 결국 지쳐서 쓰러지는 자들의 그림이지만, 성경이 그리는 세계는 TV와 신문이 도저히 상상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하나님을 찾도록 해 준다”고 말이다.


성경의 세계에서 성경 말씀과 더불어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의 성령에 이끌려 성경 말씀이 말 그대로 꿀처럼 달고 귀해서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깊이와 재미와 감사가 매일 넘친다. 그리스도인에게 TV의 현실은 그야말로 ‘전적 타자’이고 전혀 관련이 없다. 우리가 알고 익숙하고 친숙한 세계는 성경이 그려 주는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도시다.


성경 밖에서 육신의 때를 산 결과
한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대한 풍요의 나라, 미국에만 도착하면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것처럼 목숨을 걸고 이민을 가서 일에 미쳐 살았다. 겨우 살 만한 자리를 마련하고 아이들도 독립시켰지만 영혼의 삶과 관계없이 산 결과는 눈물뿐이었다. 최고로 잘 사는 것은 예수 안에서, 성경 안에서 사는 것인데, 육신의 때에 영원을 향한 그리움과 영혼의 거룩함을 배우지 못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란 말인가.


신약성경에 이스라엘 민족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드는 장면이 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갖가지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겨 모여들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목숨을 살리려거든 예루살렘에서 도망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부딪히게 된다. 훗날 로마 황제가 된 티투스 장군은 주후 70년경에 예루살렘을 초토화했는데,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을 정도로 처절하게 파괴했다. 당시 예루살렘의 모습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로마군에 둘러싸여 예루살렘성 밖으로 도망칠 수 없던 이들은 굶어 죽거나 자기 자식을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예루살렘은 겉보기에 그럴듯하지만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되지 못했다. 멸망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바벨론은 유대인들이 포로로 끌려가서 어쩔 수 없이 살게 된 제2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당시 세계 최고의 강대국에 속한 도시이고 가장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최강의 도시 바벨론을 떠나라고 하셨다. 하지만 당시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대인 중 일부는 그대로 남아서 신앙의 고향 이스라엘로 되돌아오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바벨론 사람이 되어 부유한 도시에서 쾌락하고 즐기면서 살다가 바벨론 멸망과 함께 몰락하고 말았다.


광야에서 얻는 영혼의 부유함
도시의 풍요함은 늘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를 게으르게 해서 마구잡이로 살게 한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땅인 가나안은 황무지였다. 하나님은 도시를 버리고, 척박하고 먼지 날리는 황무지에서 살기를 권하셨다.


인간은 끊임없이 부와 명예와 권력을 추구한다. 최근에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부와 명예를 가져다준다고 믿는 소위 ‘기복신앙’이 판치고 있다. 이는 분명한 거짓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육체의 날이 가져다주는 부유함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육체의 시간과 육체의 날은 예수를 얻기 위한 시간일 뿐이다. 우리의 목숨이 남아 있는 시간에 우리가 단지 바랄 것은 예수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영혼의 부유함과 영원의 소망뿐이다.


우리의 양식은 무엇인가? 우리가 처한 삶의 공간이 아무리 척박하고 황량하다 해도, 우리에게 먹을 양식이 있고, 예수의 살과 피가 우리의 풍요한 생명의 양식이라면 영적 낭만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신앙인의 삶의 여정은 도시가 아니라 광야일 뿐이다. 그러나 광야의 삶이라도 예수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신다면, 예수와 함께하고 예수와 더불어 산다면, 그래서 재물 욕심과 거리를 둘 줄 알고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광야의 삶을 선택하고 그 길을 걸어간다면 주어진 육체의 시간의 의미를 알고 있는 자들이다. 그렇게 영원과 영혼을 위해서 우리의 육체를 소비하고 사용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세계에서 하나님의 기쁨이 넘치는 삶을 누려야 한다.



/김병제 목사
미 남침례신학교 목회학 박사





위 글은 교회신문 <63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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