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칼럼] 찬송가 유감(遺憾)

등록날짜 [ 2021-05-12 22:12:39 ]

주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응답을 약속하셨는데도
“주소서”라고 찬송한다면
응답이 보장된 약속을
확실히 믿는 가사는 아냐
“주셨네”가 믿음의 고백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찬양이 차지하는 비중은 어떤 것에 비해서도 낮지 않습니다. 주님을 높이며 경배하는 찬양이야말로 우리가 항상 드려야 할 감사예배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찬양을 빼앗아간다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기도 어려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체포당해 투옥되었을 때도 그는 감옥에서조차 찬양하기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찬송의 영적 유익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렇게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 중에는 점치는 귀신에 들린 여종이 있었습니다(행16:16). 여종은 점치는 일로 그의 주인에게 경제적 수입원이 되었는데 여종이 바울을 여러 날 동안 따라다니면서 소리 지르며 괴롭히자 바울은 그 여종 속에 있던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그러자 그 여종의 주인은 자기 수익 원천이 끊어진 것을 알고 바울 일행을 붙잡아 장터에 있던 관리에게로 끌고 가서 고소했습니다. 이에 관리들이 그들의 옷을 찢고 매로 치게 하였고 그 후에는 옥에 가두고 간수장에게 든든히 지키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한밤중에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했고 감옥에 있던 모든 죄수가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억울하게 붙잡혀 매질을 당하고 상처 난 몸으로 감옥에 던져진 바울과 실라가 모든 죄수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기도하고 찬송했다는 사실은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아파서 신음 소리를 내고 음식을 먹지 못하여 굶주린 상태에서 찬송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찬송하는 모습은 죄수들뿐 아니라 그를 지키는 사명을 가졌던 간수장도 보았고 들었고 기이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잠시 후 간수장이 졸다가 깨어 일어났을 때 옥문이 모두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로 생각해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들이 도망가지 않고 그대로 있으니 간수장 자신의 몸을 해치지 말라고 합니다. 바울 일행이 찬송하는 것을 기이하게 여겼던 간수장은 그 말에 더 놀라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이렇듯 찬송은 심한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주님의 위로와 평강을 누리게 하는 놀라운 영적 동인(動因)이 됩니다. 찬송은 실망한 자를 다시 소망 가운데로 세워 주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양할 때 우리의 신앙이 날마다 새롭게 성장하는 기쁨을 누리게 됨을 우리는 매우 분명하게 경험합니다.


믿음의 찬송 가사 사용하길
우리의 신앙을 바르게 세워 주는 찬송가를 부르다 보면 찬송가 가사가 성경에 근거한 우리의 믿음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퍽이나 많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가사가 “주소서”로 끝나는 것들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승리를 보장해 주셨는데도 여전히 “주소서”라고 하면 이미 승리가 보장된 것을 믿지 못한다는 말이 되고 말지 않겠습니까.


“주소서”로 끝나는 가사를 “주시네”로 부르거나 “주셨네”로 바꾸어 부르는 것이 적극적인 믿음의 고백으로서의 찬양이 될 것입니다. 허구한 날 “주소서”, “하소서”로 찬송을 부르면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일깨워 드려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게 하는 의미가 될 수 있기에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새찬송가 17장 ‘사랑의 하나님’ 마지막 소절은 “이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소서”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가사는 우리가 하나님께 끝날까지 함께해 주시기를 구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주님이 오히려 그렇게 함께해 주실 것을 이미 약속하셨고 우리로 그러한 사실을 믿음으로 받기 원하시기에 우리로서는 “이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시네”라는 감사 어린 신앙고백으로 드려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것이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신앙고백이 성경 말씀과 배치되는 것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박영철 목사
침례신학대학교 명예교수
주님의기쁨교회 담임




위 글은 교회신문 <698호> 기사입니다.


    아이디 로그인

    아이디 회원가입을 하시겠습니까?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이디/비번 찾기

    소셜 로그인

    연세광장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