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칼럼] 부활의 은혜

등록날짜 [ 2022-04-20 18:45:15 ]

예수께서 고난의 길을 가시며

인류에게 영생을 주신 것처럼

알 수 없는 고난 겪는 중에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 낸 자만이

부활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어


부활의 기쁜 아침이 밝았다. 부활의 기쁨은 고난을 통해 얻어진다. 또 부활은 고난을 이긴 예수님이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고난을 향해 나아가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이미 부활의 승리가 고지된다.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과 논쟁하면서 예수님은 언제나 죽음 앞에 당당하다. 예수님은 자신이 왜 그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즉 ‘왜?’라고 묻지 않는다. 단지 고난을 향해 나아가며 흔들리지 않고 생명의 일을 할 뿐이다.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마치고 겟세마네에 하는 예수님의 기도,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는 고난을 이기는 예수님의 모습을 극적으로 드러내 준다. 고난 앞에서 예수님은 두려워하고 억울해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 그것은 이미 승리다. 그러므로 고난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순간, 곧 다가올 체포와 심문과 죽음을 앞둔 겟세마네에서 올려 드리는 예수님의 기도는 예수님의 승리를 예고한다. 예수님은 고난 속에서 이미 고난을 이겼다.


부활은 고난을 이길 유일한 힘

반면 우리는 고난 앞에서 언제나 ‘왜?’라고 묻고, 자신이 당한 고난에 대해 억울해한다. 고난당할 이유가 없다는 것 때문에 괴로움이 더하고, 찾을 수 없는 답을 찾으면서 몸부림치는 사이에 고난은 더욱 무거워지고 삶은 더욱 지친다.


그러나 예수님은 ‘왜?’를 찾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꿋꿋하게 죽음을 향한다. 물론 죽음에 이르는 예수님의 고난에서 ‘왜?’가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는다. 모든 고난을 받아들인 후에, 이미 고난 속에서 승리한 후에, 이제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 ‘왜?’라고 묻는다.


같은 질문이라도 그것을 언제 묻느냐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고난의 이유를 알아내야겠다고 고난을 견디기도 전에 우리가 던지는 ‘왜?’에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고난을 겪어 낸 후, 마지막 순간에 던지는 ‘왜?’는 분명한 답을 가져온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부르짖었던 ‘왜?’는 곧 부활이라는 답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왜 버리셨나요?’라고 물었다면, 부활은 ‘살리기 위해서’라는 하나님의 답변이다.


부활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죽임당한 것은 예수님이지만, 그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신 분은 하나님이다.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무고하게 죽임당한 예수님의 손을 들어 준다.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자신들의 승리를 기뻐하는 순간, 하나님은 그것을 뒤엎는다.승리는 그들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이다.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죽음조차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을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능력의 선포가 부활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악한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의 선을 드러내는 일이며, 막막하고 답답한 현실을 견디게 하는 유일한 힘이다.


부활의 은혜는 예수님처럼 고난을 견딘 자에게만 일어난다. 알 수 없는 고난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켜 낸 자만 부활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고자 한다면, 예수님이 고난을 어떻게 견뎠는지를 생각할 일이다. 그렇다면 모든 순간에 ‘왜?’라는 질문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언제든지,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예기치 못한 고난에도 질문이 아니라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무고하게 당하는 고난만큼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아마도 그래서 바울은 부활의 은혜를 이야기하면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했는가 보다. 그러나 그렇게 ‘왜?’를 붙잡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붙잡은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은혜가 부활이다.



/김호경 교수
서울장신대 신학과


위 글은 교회신문 <74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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