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교회 역사 이야기<8>] 콘스탄틴 시대 니케아 공의회 사건

등록날짜 [ 2011-06-21 14:59:41 ]

정치적 목적으로 단행한 ‘정교일치’사상 확립
‘예수 신성’ 부인하는 아리우스파 추방당하다

콘스탄틴은 막센티우스와 일전을 벌이기 전날, (아마도 태양신에게) 기도했다. 그런데 그가 태양을 바라보는 순간, 하늘에 십자가가 보였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십자가만 본 것이 아니라 “이 징표로 너는 승리할 것이다”라는 글자도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밤, 콘스탄틴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방패에 크리스천의 상징을 새기라고 명하는 꿈을 꾸었다(그리스어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나타내는 첫 글자는 영어의 ‘XP’ 모양과 흡사했다).

다음 날 아침, 콘스탄틴의 병사들은 각각 자신의 방패에 이 글자를 새겼고, 콘스탄틴은 자신의 군기에 십자가까지 새겨 넣었다.

막센티우스는 난공불락의 요새에 진을 쳤다. 하지만 로마 시민의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따라서 그가 도시 안에서 싸울 경우,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그에게 불만을 품은 시민이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이에 막센티우스는 도심을 떠나 외곽으로 향했고, 콘스탄틴은 도시 바깥에서 싸우려고 도시로 진입하는 밀비안 다리를 파괴했다. 그리고 만일에 대비해 퇴각로를 확보하려고 보트를 일렬로 세워 임시 다리를 놓았다.

드디어 강 북쪽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곧 전세가 불리해진 막센티우스는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막센티우스 군대가 임시로 만든 다리를 건널 때 다리가 무너져, 막센티우스를 포함한 병사 수백 명이 익사했다.

콘스탄틴은 십자가 상징을 새긴 군기를 높이 들고 당당히 로마에 입성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십자가가 권력 쟁탈을 위한 전쟁의 피로 적셔진 순간이었다.

기독교의 새로운 후원자
그 이듬해, 콘스탄틴과 공동황제 리키니우스(Licinius)는 ‘밀라노 칙령’을 반포했다. 그들은 “우리의 목적은 크리스천들과 다른 모든 사람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예배할 수 있게 허락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하늘에 있는 어떤 신이라도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 것이다”라고 포고했다.

콘스탄틴에게 그리스도는 개인적인 수호자였다. 한때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한 십자가가 이제는 콘스탄틴의 권력을 보증하는 매력적인 표상이 되었다. 콘스탄틴은 교회 지도자들을 전폭적으로 후원했다.

콘스탄틴은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그는 예수를 ‘태양신’으로 섬긴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처럼 혼동을 일으킨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를 “의로운 해”(말4:2), “세상의 빛”(요8:12)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심지어 콘스탄틴은 ‘주일’을 ‘태양의 날’(Sun-Day)로 예배하기도 했다.

니케아 공의회
콘스탄틴 시대에 여러 교회에서 심각한 말다툼이 벌어졌다. 이 사건의 발단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장로 아리우스에게서 시작한다. 아리우스는 하나님이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예수가 완벽한 신이라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슬픔과 고통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크리스천들은 아들이신 하나님께서 감정을 느끼신 것이 확실하며 이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고 믿었다. 하나님이 감정을 느낄 수 없다고 믿은 아리우스는 다른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았다.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라고 가르친 것이다. 아리우스는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첫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아들인 하나님은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콘스탄틴은 예수가 하나님인지 그렇지 않은지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국 통일과 통합에는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는 제국의 백성이 다투고 분열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모든 감독을 소아시아 북쪽 니케아라는 작은 도시로 불러 모았다. 325년 7월 4일, 감독 300명과 장로와 집사 2000명이 니케아에 도착했다. 콘스탄틴은 자기 자신을 사도이자 감독이라 천명한 뒤 공의회를 주관했다.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한 집단이 아리우스를 탄핵했다. 아리우스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집단은 아리우스를 옹호했다. 회의 참석자 대다수는 아리우스 사상에 찬동하지 않았지만 평화로운 해결을 원했으므로 목소리를 낮추고 조용히 지켜보았다. 적어도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감독 한 명이 아리우스 사상을 설명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창조했다고 주장하자 군중이 일시에 동요하기 시작했고, 감독 한 명이 “하나님을 모독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다른 감독 한 명은 아리우스의 원고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이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감독 한 명이 아리우스 사상을 물리치기 위한 신앙진술서를 작성하자고 제안했고, 공의회는 그가 제출한 진술서 초안을 약간 변경하여 니케아 신조로 채택했다.

감독 300명 중의 2명만이 신조에 서명하기를 거부했을 뿐, 모두 이에 서명했다. 공의회는 서명을 거부한 감독 2명에게도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하지만 콘스탄틴은 그 정도에 만족하지 않고 신조에 서명하기를 거부한 두 감독을 추방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4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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