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6.25 전쟁 발발 60주년] 외국 선교단체 도움으로 교회 재건
전쟁과 교회의 수난 ②

등록날짜 [ 2010-06-21 23:09:57 ]

종전 후 교회는 미국과 연합, 구호 활동 나서
군 선교 중요성 깨닫고 군목제도 확립·정착

교회는 전쟁 동안에도 꾸준히 교회가 해야 할 임무들을 수행하였다.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을 탈출한 교역자들과 미점령 지역의 교역자들이 모여 대전 제일교회에서 ‘대한기독교구국회’를 구성하였다. 구국회는 국방부, 사회부와 긴밀한 연락을 하면서 구호.방송 사업에 참여하였고, ‘기독교연합전시비상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미국 투르먼 대통령과 유엔 사무총장 그리고 유엔군 사령관에게 호소문을 보내기도 했다.

한국교회 대표로 장로교회의 한경직, 감리교회의 유형기를 미국에 파송하여 한국 지원을 호소하였다. 이들의 노력으로 거제도와 제주도에 피난 간 기독교인 2만 명과 교직자 1000명에게 구호품을 전달했다.

선교회와 구호 단체들의 시작
6.25 전쟁이 끝나고 여러 선교 단체들이 들어왔다. 먼저 한국에 들어온 선교회는 남침례회였다. 그들은 대전에 신학교를 세우고 신학생들을 훈련하면서 선교하였다. 이때 이 선교회를 이끈 사람은 에버내티 목사였다. 그 외에도 나사렛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순복음교회 등이 서울이나 인근에 거점을 확보하고 활동을 개시하였다.

팀미션은 1953년부터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선교회는 교회 설립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고아원, 성경학교 등을 운영하였으며, 특히 방송 선교와 문서 선교를 통해 교파 구별 없이 기성교회를 돕는 선교활동을 하였다.

1956년 인천에 극동방송국을 세워 국어,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몽골어, 우크라이나어 등으로 방송하여 공산권 선교에 큰 공헌을 하였다. 팀미션이 방송을 시작하기 전 이미 기독교방송국이 선교 방송을 하고 있었다. 1949년 정부는 기독교방송국 설치를 인가하였다. 설치하는 비용은 재한 선교부들이 분담하였다.

선명회도 6.25 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단체이다. 선명회는 복음 선교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하려는 목적으로 세워졌다. 전란으로 많은 이재민이 생기자 이들을 돕기 위해 1953년 한국에 진출하여 대구에 본부를 두고 기존 교회나 선교부의 사업에 협력하였다.

콤패션은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에베레트 스완슨 목사가 세운 단체다. 그는 1952년에 내한하여 미군들을 위해 부흥집회를 하고 돌아갔다. 한국 군종감실에서 다시 한국에 와서 집회해달라는 요청을 하자 이듬해 다시 한국에 와서 수많은 전쟁고아를  보고 고아원 사업을 하기로 하고 콤패션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그는 전국에 190여 고아원을 설립하여 2만여 고아들을 수용하고 교육하였다.

군목제도의 시작
군대 선교가 시작되고 많은 장병이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신자들이 늘어갔다. 그들이 제대한 후 고향에 돌아가 계속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한국교회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군목제도는 선교사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일제 말엽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선교지를 떠난 선교사들이 제2차 대전이 끝나고 해방을 맞아 다시 선교지로 돌아왔다. 그들은 미 군정청의 여러 요직에서 활동하고 군목으로 복무하는 이들도 있었다.

미 군정청은 한국 군대의 훈련을 지도하기 위해 ‘미국 군사고문단’을 조직하였는데, 이 본부는 대구에 있었다. 이때 대구 지역 장로교회가 차태화 목사와 캠벨 목사를 훈련병들에게 파송하여 신앙지도를 한 것이 한국 육군 군목제도의 효시다.

1949년 5월 차 목사는 한국 육군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예배를 드렸다. 1950년 6.25가 일어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애담스와 캠벨은 고문단 참모부에 군목제도 신설을 청원했다. 그러나 참모부가 이를 무시하여 실현하지는 못했다.
1950년 9월 캠벨이 일본에 갔을 때 미군 사령부 군종참모로 있던 벤넷 대령을 만나 한국 군목제도 신설을 청하였다. 벤넷은 이를 좋게 여겨 맥아더 사령관에게 보고하였고, 맥아더가 연합군 사령관으로 한국에 진주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군목제도의 허락을 받아 냈다.

해군에서는 군목제도를 시행하기 전에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 1948년 당시 해군 참모총장인 손원일이 정훈장교 형식으로 해군 내에서 목사들을 일하게 한 일이 있었다. 그 후 장로교회의 권연호, 감리교회의 나사행, 성결교회의 최정원 목사 등의 교계 인사들 역시 이 제도의 정착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진언하여 재가를 얻었다.

1951년 정월 감리교 선교사 쇼와 가톨릭 선교사 캐럴 신부는 대구에 군목학교를 개설하라는 명을 받고 개교를 서둘렀다. 1951년 2월 제1회 군목학교 졸업생 39명을 배출했다. 그리고 1954년에 정식으로 군목을 장교로 임관했다. 이러한 군목제도를 실현한 것 역시 그 어느 선교지에서도 없었던 최초의 사건이었다. 군목제도가 법적으로 확립한 것은 1961년 4월 군목 신분령에 관한 국무원령 제234호에 의해서였다. <끝>  

위 글은 교회신문 <19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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