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교회 역사이야기-1] 로마 시대 크리스천의 운명

등록날짜 [ 2011-05-02 09:23:20 ]

당시 사회 폐단을 인정하지 않아 배척받음
근거 없는 추측과 소문으로 오해 속에 살아

이번 호부터 예수 부활 이후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 이후 2000년 역사를 돌아보며 지금 우리가 듣는 복음이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왔는지를 공부하여 신앙 성숙에 큰 유익이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AD 64년 불타는 로마
AD 64년 무더운 여름 어느 날, 로마에 불이 났다. 뜨거운 화염이 6일간이나 도시 전체를 집어삼켰고, 매캐한 연기가 사라졌을 때에는 로마 14개 행정구역 중 10개 구역이 시커먼 재로 변해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네로 황제는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머물렀다. 그는 급전(急傳)을 듣자마자 로마로 돌아와 소방대를 조직하여 진화에 힘썼고, 시민 수천 명을 궁정 정원으로 대피하게 했다. 그러나 재건을 시작할 무렵, 로마 시민 대부분은 황제가 통치를 잘못하여 그런 비극이 일어났다고 네로를 비난했다.

네로는 사나운 민심을 잠재우려 황실의 보석까지 시민에게 나누어주었지만, 소문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이에 네로는 궁여지책으로 화재 책임을 인기 없는 소수집단인 크리스천에게 뒤집어씌웠다. 그리고 크리스천을 가혹하게 박해했다. 이로써 그는 기독교 신앙을 최초로 박해한 로마 황제가 되었다. 어떤 역사가는 “그들은 크리스천에게 동물 가죽을 씌워서 개에 물려 죽게 했으며,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으며, 산 채로 불살라 로마 궁정의 야간 옥외 연회장을 밝히는 조명으로 삼기도 했다”고 당시 끔찍한 박해 상황을 전하기도 했다.

네로의 박해로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했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는 자신이 구세주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하여 거꾸로 매달아달라고 청해 순교했다고 한다. 또 이때에 사도 바울은 로마 당국에 체포되었다. 로마 시민을 십자가에 매다는 것이 불법이었으므로 바울은 칼에 죽임을 당했다. 그렇다면 당시 크리스천이 로마인 사이에서 그다지 좋은 평판을 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크리스천은 다른 신을 거부했다
크리스천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믿었다. 로마인에게는 그런 믿음이 오만방자해 보였다. 로마인 대부분은 자신이 아는 모든 신에게 제사를 드림으로써 모든 영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죽은 황제에게 분향하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황제는 죽으면서 “이제 과인은 신이 되노라” 하고 말했다고 한다.

더욱이 그들은 그들 자신만을 위해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제국을 위해 제사를 바쳤다. 그들은 여러 신에 제사를 드리면 다양한 신이 로마 제국의 안녕과 번영을 도우리라 믿었다. 로마인은 어떤 신이라도 그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행위로 간주했다. 그런 사람은 신변 위협을 각오해야만 했다. 따라서 크리스천이 로마인의 인기를 얻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주의 만찬에 대한 오해
크리스천이 예배를 마친 후 거행하는 주의 만찬을 “사랑의 공동 식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는 것”(요6:53~56;고전10:16,11:23~27;유12 참조)이라고 말했을 때, 로마인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 또 신자들은 서로 ‘형제자매’라고 불렀는데, 이는 이집트에서 성행위 상대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었다.

주의 만찬과 ‘형제자매’라는 용어를 오해하는 것은 크리스천을 부정적인 인상으로 대하기에 충분했다. 로마인은 크리스천의 관습이 해괴망측하다고 여겼고, 기독교를 매우 위험한 사교(邪敎)라고 단정했다. 그렇다고 로마인이 예배에 직접 참여하여 오해를 풀 수도 없었다. 크리스천은 주의 만찬을 거행할 때에 불신자들이 구경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직접적인 정보가 전혀 없이 그릇 판단하여 크리스천이 동족을 잡아먹고 근친상간을 한다고 비난했다.

당시 사회 폐단에 맞서다
바울은 “너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라고 선포했다. 성별(性別)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다 중요하다고 말한 것이다. 모든 크리스천은 바울의 말을 따라 살았다. 이것이 로마인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교회는 비천한 계층 사람들을 환대하여 모든 인간의 생명을 귀하게 여김으로써 로마 사회 구조에 도전했다. 로마는 노예가 유산을 물려받는 것을 법으로 금했고,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했다. 하지만 크리스천은 노예와 여자를 남자와 동등한 존재로 여겼다.

로마 가정의 아버지들은 아기를 키우고 싶지 않으면 갓난아기를 들판에 갖다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그렇게 버린 아이들을 양자로 받아들임으로써 로마 아버지들이 버릇처럼 행사하는 친자 양육 거부권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또 크리스천은 제사도 드리지 않았고, 성전도 없었고, 신성한 도시도 갖고 있지 않았다. 크리스천은 이웃에게 평범하지 않고, 안전하지 않고, 달갑지도 않은 존재로 비쳤다. 그런 오해 속에 AD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함락은 크리스천에게 또 다른 시련을 안겨주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3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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