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기독교 유적지를 찾아서(12)] 참혹한 6.25사변의 비극과 순교자들
구림교회

등록날짜 [ 2013-10-29 11:14:57 ]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성도 18명 가두고 불태워
신앙의 긍지로 그 지역에 복음 선교의 맥 이어 가 

<사진설명> 현재 영암 구림교회.

구림교회는 1922년 구림공립보통학교 교장 사모였던 김숙자가 김학동, 이신흥 등과 함께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에 예배처를 마련하여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자 교회에는 복음이 확산하기를 바라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이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해방된 새 세상에서 나라의 재건과 자립을 위해 힘을 키우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때 영암지역도 교회 9곳을 중심으로 사랑의 나눔이 아름답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이 불법 남침해 일으킨 6·25전쟁은 평화롭던 영암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고 말았다. 영암지역은 험준한 월출산 산세 때문에 지방 공산당의 은거지와 빨치산의 중요한 활동거점이 되었다. 유달리 우익성향이 강하고, 기독교 영향력이 컸던 이 지역에 인민군이 남기고 간 상처는 남도지역 어느 곳보다 깊고 컸으며, 교회가 당한 참화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북한 공산군이 밀물처럼 들이닥쳐 휩쓸고 지나간 후, 10월 초순에 빨치산들이 해남군, 강진군, 장흥군에서 월출산으로 모여들었다. 이때부터 구림교회당을 불태우고 교인과 우익인사들을 잡아들였다.

최의순 권사(영암신복교회)의 어머니인 당시 구림교회 김정림 집사도 공산당에 연행되어 큰 도로변 주막집에 감금되었다. 이미 그곳에는 구림교회 성도 18명과 면내 우익인사 6명이 끌려와 있었다. 이들은 모두 주막집에 감금된 채 두려움 속에서 하룻밤을 지새웠다. 공산당은 잡혀 온 구림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한마디만 하면 살려 준다”고 거듭 회유하고 협박했다. 그러나 성도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신앙을 지켜왔던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신앙을 저버리는 불신앙 대신, 당당하게 순교의 길을 선택했다.

1950년 10월 4일 아침 일찍 어머니에게 아침을 갖다 드리려고 주막집으로 가던 최의순 권사는 멀리 보이는 주막집에서 솟아오는 불길과 연기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공산군이 성도들을 가두고 집을 포위한 채 불을 지른 것이었다. 불길에 몸부림치는 비명이 1km 떨어진 곳에서도 들릴 정도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히려 찬송가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감금된 주민 중에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죽음 앞에서는 함께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절규했다. 이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도 오히려 우렁차게 흘러나오는 찬송가 소리와 함께 부르짖는 기도 소리에 놀란 인민군이 되레 벌벌 떨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이날 일어난 참화로 구림교회 성도 18명이 순교를 당했다. 1950년 10월 7일에는 우리 국군과 경찰 선발대가 영암읍을 수복하자 궁지에 몰린 공산당은 애국지사와 대한청년단원, 교인과 양민 모두 28명을 군서면 구림리 신근정 민가에 가두고 불을 놓아 집단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이처럼 처참하게 최후를 마친 이들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려고 1950년 10월 10일 바로 그 자리에 잿더미 속에서 뼈를 찾아 장례를 치렀다. 그 후 27년 만인 1976년에 다시 공산당이 저지른 만행을 규탄하고 신앙을 지키다 죽은 이들의 순교 정신을 본받고자 구림고등학교 앞에 순절비(殉節碑)를 세워 잔혹무도한 공산당의 만행을 상기케 했다.

<사진설명> 순교비.

애국지사를 포함한 일반인 희생자를 위한 순절비를 만들었다면, 신앙을 지키다가 희생당한 이들을 후손들이 본받게 하기 위해 순교비(殉敎碑)를 만들었다. 순교비는 구림면 전체 순교자를 위하여 2000년에 영암군교회협의회 주도로 순교자 학살 현장에 세웠다. 순교비에는 영암읍교회 25명, 상월교회 26명, 구림교회 18명, 천해교회 7명, 삼호교회 2명, 서호교회와 매월교회 각 1명의 이름을 새겼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서울이 수복된 후 북으로 도주하던 인민군 패잔병과 빨치산은 전쟁 막바지까지 우익인사들과 기독교인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이 때문에 영암군은 6·25를 지나면서 13만 인구가 8만으로 줄었고 이 지역 여섯 교회에서 순교자가 82명이 나오는 등, 영암지역에는 전쟁의 아픈 상처가 가장 깊게 남아 있다.
지금도 이곳 신앙의 후손은 해마다 6·25가 돌아오면 순교자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기도하며 당시 참상을 회고한다. 그리고 순교자의 피로 지킨 교회의 전통과 뿌리 깊은 순교신앙의 긍지를 갖고 복음 선교의 맥을 이어 가고 있다.
 
특별취재팀

위 글은 교회신문 <35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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