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사변 당시 남북한의 교회 수난] 다시는 이런 동족상잔의 비극은 없어야

등록날짜 [ 2015-06-23 11:24:04 ]

크나큰 수난을 겪은 과거,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며

6·25사변이 발발한 지 올해로 65주년을 맞이한다. 6·25사변은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다시없는 동족 간의 대 참살극이자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민족의 아픈 상처다.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피폐는 모든 분야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을 안겼지만, 그 어느 곳보다 교회는 크나큰 수난을 겪었다.

북한 지역 교회 초토화
북한 지역은 해방 이전부터 기독교 영향력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강했다. 공산 정권은 기독교인들의 정치 활동뿐만 아니라 교회를 무력화하기 위한 정책을 계속했는데, 김일성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기독교 신자들과 그 지도자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외국어에 능한 사람이 많아서 북한의 실정을 외부 세계에 전달할 가능성이 크고, 순교를 각오한 채 북한에 남아 공산 정권에 대항하는 이가 많았으며, 일반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며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인사들이 많았고, 언제든 지지자들과 합세해 공산당 반대 운동에 뛰어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을 내버려둔 채로는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없었으므로, 김일성은 기독교 말살 정책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공산 정권은 일찍부터 교회를 자본주의에 대한 옹호 기관으로서, 미국인들의 앞잡이로서, 이승만 지지와 남한에 대한 선호성을 가진 존재로서, 민족주의자들의 집합소로서 낙인을 찍었다. 해방 당시 농촌이나 도시나 기독교인들이 자치단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으므로 교회의 세력을 약화하기 위한 박해는 정치적 성격을 띤 것이 많았다.

북한은 해방 이후부터 종교에 대해 제한-탄압-말살-역이용이라는 4단계 정책을 통해 1959년까지 모든 종교 단체와 종교의식을 말살했고, 모든 종교인을 반동분자라는 죄목으로 살해하거나 박해했다.

김일성은 교회 지도자들을 제거하는 데 역점을 두고, 여러 가지 명목으로 사건을 날조하고 납치해 처형했는데, 특히 1950년 6·25사변을 하루 앞둔 6월 24일에 기독교 인사들을 일제히 검거해 처형했고, 6·25동란 중에도 체포와 처형은 계속됐다.

전쟁 중 남한 교회 피해
인민군이 서울에 입성하자 지하에 숨어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제때를 만났다. 불행하게도 기독교인들을 색출하고 검거하는 데 기독교인들이 앞장섰다. 유엔군의 개입으로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리에 진행돼 서울 수복이 눈앞에 오자, 공산군은 후퇴하면서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학살하거나 납치했다.

6·25사변 중 북한군과 공산당에 의해 순교한 기독교 교직자는 이름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사람만 176명이고, 납북된 교직자는 194명, 피살·피랍된 이를 합하면 370명에 이른다. 집단 학살 사건의 희생자가 된 교인도 많았다. 한 마을 교인을 집단으로 학살하거나 교역자 일가족을 무참하게 살해한 사건도 여러 건이었다. 인적 피해뿐만 아니라 수많은 교회가 소실되고 파괴되는 환난을 겪었다.

장로교회 소속 예배당 소실이 152동, 파손 467동, 감리교 소속 예배당 소실이 84동, 파괴 155동, 성결교는 소실 27동, 파괴 79동, 구세군은 소실 4동, 파괴 4동 등이었다. 침례교는 6·25사변 발발 이전까지 이북을 중심으로 활동했기에 피해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이 모든 것은 단지 통계일 뿐 실제는 이보다 훨씬 피해가 컸을 것이다. 많은 피해가 있었을 것이다.

교회 재건과 선교회 활동
교회는 6·25사변 동안에도 꾸준히 교회가 해야 할 임무들을 수행했다. 사변이 발발하자 서울을 탈출한 교역자들과 미점령 지역 교역자들이 모여 대전 제일교회에서 ‘대한기독교구국회’를 조직했다. 구국회는 국방부, 사회부와 긴밀한 연락을 하면서 구호·방송 사업에 참여했고, ‘기독교연합전시비상대책위원회’를 조직해 미국 투르먼 대통령과 유엔 사무총장 그리고 유엔군 사령관에게 호소문을 보내기도 했다.

6·25사변이 끝나고 여러 선교 단체가 들어왔다. 먼저 한국에 들어온 선교회는 남침례회였다. 그들은 대전에 신학교를 세우고 신학생들을 훈련하면서 선교했다. 이때 이 선교회를 이끈 사람은 에버내티 목사였다. 남침례회는 후에 현재 침례교단을 있게 하는 데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그 외에도 나사렛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순복음교회 등이 서울이나 인근에 거점을 확보하고 활동을 개시했다.

북한 공산 정권의 침략으로 수많은 교회가 파괴되고, 교역자들이 순교당하고,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 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에 힘입어 오늘날 1200만 명에 이르는 교인들로 부흥했다. 우리는 다시는 이와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영육 간에 지은 죄를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만방에 전해 하나님께서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가 되도록 나 자신부터 새로워져야 할 것이다.

특별취재팀
 

위 글은 교회신문 <43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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