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성탄절, 눈물과 기쁨이 공존하는 날

등록날짜 [ 2015-12-22 13:30:12 ]

우리는 주변 사람 중 누군가 생일을 맞으면 해마다 그를 축하하거나 기념한다. 하지만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사람의 범위는 그리 넓지 않다. 대부분 부모님이나 형제자매, 가까운 친구 정도일 것이다. 그만큼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하거나 기념하려면 그 사람과 매우 친밀한 관계여야 한다. 생일을 축하하거나 기념하는 방식도 그 대상과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첫돌을 맞은 자녀를 축하할 때는 아이의 미래를 축복하고, 부모의 회갑에는 지난날을 회상하며 어버이의 노고에 감사를 표한다. 또 나라에 큰 학문적 발자취를 남긴 학자의 생일이라면 전 사회적 규모의 학술대회를 열어 그의 업적을 기념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성탄절을 앞두고 우리가 과연 예수의 탄생을 기념해야만 하는지, 또 기념한다면 어떤 태도로 해야 하는지는 그가 어떤 분이며 나와 어떤 관계이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예컨대, 성탄절을 기념할 필요나 이유를 모르겠다는 사람은 예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다. 모르는 사람의 생일을 챙기지 않듯,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지 않는다면 그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 피의 고난은 자기 소유가 아니며, 따라서 고난으로 주신 천국 갈 밑천도 자기 것이 아니다. 모름지기 예수를 구주로 모신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분의 탄생을 기념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성탄, 기쁨과 통곡의 이중주
인간과 예수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그리스도인이 성탄을 기념하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바로 넘치는 기쁨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회개할 기회를 얻었고, 회개함으로 영혼의 때에 반드시 치러야만 할 지옥의 영원한 고통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마귀의 결박에서 해방되어 영적 평안을 누릴 자유를 얻었다. 예수로 말미암은 이 은혜를 소유했다면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 행복은 마치 복권이 당첨되듯 거저 이루어진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경망스레 기뻐할 수만은 없다. 우리가 천국 영생과 평안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복은 공짜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피와 고통의 값을 치르셨기에 비로소 내게 주어진 복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우리 모두 죄인이라는 데서 비롯한다.

인간은 세상의 윤리나 법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 앞에서 모두 죄인이다. 예수께서는 산상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라고 하셨다. 이 엄격한 명령 앞에 죄인이 아닌 사람이 있을까. 이처럼 법이나 도덕보다 엄격한 하나님의 숱한 명령에 불순종한 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망과 지옥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셨지만 공의로운 분이셨기에 인간의 죄악을 그냥 없는 셈 치지 않으셨고 죄의 결과로 당하는 정녕 죽으리라는 법을 폐하지도 않으셨다. 대신 인간에게 닥칠 죄의 대가를 없애 주시려고 독생자 예수를 인간 대신 고난받고 죽게 해, 죄에 따른 사망의 법을 집행하셨고 인간에게 사랑을 확증해 보이셨다.

그로 말미암아 인간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회개할 수 있었고, 마귀의 결박에서 해방되었으며,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것은 예수의 탄생 그 자체로 주어지지 않았고,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께서 채찍에 맞아 살 찢기고 피 흘리며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탄의 기쁨 한가운데서 그의 고난을 보아야 하고, 본래 내 몫이던 예수의 통곡을 내 것으로 가져야 한다. 기쁨과 통곡의 이중주, 그것이 성탄을 기념하는 우리가 품어야 하는 마음이다. 이 두 마음이 합하여 극진한 감사가 된다.

만약 성탄을 앞에 두고도 기쁘지 않고 통곡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구원이 무엇인지, 그 구원을 위해 치른 예수라는 값이 무엇인지를 체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녀가 명문대에 들어가면 절로 웃음이 나오고, 몸살만 나도 신음이 입을 헤치고 나오는데, 그 큰 은혜와 고난을 안다면 어찌 기쁨과 통곡을 표출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마귀를 멸하고 영생을 주러 오신 예수
성탄 때만 되면 각종 언론과 지식인들은 예수를 ‘낮은 곳에 임하신’ 박애주의자 혹은 혁명가로 규정하고 우리도 그를 닮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예수께서 병에 시달리던 환자, 불구로 고통받던 장애인, 가난과 차별에 시달리던 과부, 사회 저변의 밑바닥 인생들, 이를테면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신 것만 강조한다.

물론 그 역시 사실이지만,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까닭은 궁극적으로 마귀의 일을 멸하고, 인간의 죄를 대속해 인간에게 영생을 주시려는 영적인 목적 때문이었다. 그런 영적 측면을 알아보지 못하니, 예수께서 주신 육신의 복만 강조한다. 그리고 인간의 죄를 대속하신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한낱 박애주의자나 혁명가로 폄하한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예수의 성탄을 기념할 수는 없다. 더욱이 술과 방탕, 음란으로 밤을 지새우는 방식으로 성탄을 기념할 수 없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세상에는 성탄을 지내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지만, 그중 옳은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모든 인간에게 예수는 같은 은혜를 베푸셨기에 인간과 예수의 관계는 한 종류일 수밖에 없다. 성탄을 올바르게 보내려면 기쁨과 통곡을 응축한 극진한 감사로 그분의 은혜를 찬양해야 한다. 이제 성탄을 기념하는 우리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기념을 받으시는 예수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자. 성탄을 기념하는 나와 우리의 모습에 예수께서 기뻐하실 수 있을까. 

이계룡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46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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