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보는 30년사] 사모세미나 시작과 수원흰돌산기도원을 인수하기까지
1995년

등록날짜 [ 2016-03-15 13:40:00 ]


<사진설명> 제8차 전국 사모세미나를 마치고 충성자들과 함께.

윤석전 목사는 교회를 개척한 지 2년 정도 되자 목회자세미나를 하고 싶었다. 개척교회 목사가 목회자세미나를 개최한다면 아무도 참석할 것 같지 않았다. 또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도 몰랐다. 하지만 세미나를 열고 싶은 마음이 계속 샘솟았다. 이것은 성령에게서 온 생명의 힘이었다.

윤석전 목사는 먼저 성령의 감동에 따라 사모세미나부터 열기로 마음먹었다. 목회하기 전 집사 시절부터 전국 각처에서 성회를 인도하다 분란이 벌어진 교회를 들여다보면 대부분 사모의 문제였다.

사모들은 처음에는 주님 사랑하는 마음에 열정 다해 목회를 동역하지만 성도에게 시달리고 목사에게 시달리고 돈과 환경에 시달리다가 사명을 잊고, 교회에서는 설 곳 없이 영적으로 방황했다. 사모들이 처한 이런 현실이 안타까워 사모세미나를 열기로 한 것이다. 

당시 연세중앙교회가 소속해 있던 경기지방회장이자 윤석전 목사의 맏동서인 이대직 목사님께 사모 세미나를 설명하고 사모님들을 모아 달라 부탁했다.

그렇게 제1회 사모영적세미나를 1988년 8월 15일 경기도 용인군 죽전교회 본당에서 열었다. 당시 경기지방회 사모 19명 중 18명이 참석했다. 비록 적은 인원이지만 아침 먹고 오후 4시까지, 저녁 먹고 새벽 2~3시까지 하루에 식사 시간을 두 번만 두고 강력하게 세미나를 진행했다.

성령께서 윤석전 목사를 강력히 사용하셔서 참석한 모든 사모가 은혜받고 변화됐다. 사모들은 각자 교회로 돌아가서 즐겨 보던 TV를 내던지고 기도와 심방에 주력했다. 교회들이 생명의 역사로 들썩거렸다. 목사들에게서 전화가 많이 왔다.

“윤석전 목사님, 무슨 힘으로 그런 일을 하셨습니까? 저도 못 해 보는 사모를 어떻게 변화시켰어요?” 

몇 개월 후, 목사들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목사님, 우리 사모가 과거로 돌아갔어요. 세미나를 한 번 더 해 주세요.”

상황이 이쯤 되자 다음번에 사모세미나를 열면 많은 교회에서 참석할 것 같은 기대에 부풀었다. 경기도 하남시 산곡기도원을 빌린 후 신문에 대대적으로 광고를 했다.

드디어 1990년 10월 제2차 사모영적세미나를 열었다. 그런데 2차 세미나에 참석한 이는 143명이었다. 대부분 1차 세미나에 온 사모들에게 은혜롭다는 소문을 듣고 온 이들이었다.

윤석전 목사는 실망하지 않았다. 개척교회로서는 온 힘을 다해 사모들을 대접하면서 성령의 감동대로 강력히 말씀을 전했다.

사모들이 설교 말씀에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각자 교회로 돌아가서는 육적인 삶을 영적으로 바꾸었다.

제3차 사모영적세미나는 1991년 3월 경기도 화성군 사마리아기도원에서 열었다. 500명 앉을 자리에 600여 명이 빼곡히 들어차 은혜받았다. “사명을 망각해 목회 방해꾼이 되었다”고 성령의 감동대로 윤석전 목사가 사모들을 강력히 책망하자 설교 시간 중인데도 여기저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설교를 중단하고 통성기도를 인도하기를 여러 차례. 당시에는 사모 세미나 설교를 6~7시간 했다.

방광 약한 사람들은 얼마나 화장실에 가고 싶겠는가? 그런데 그 긴 시간 말씀을 듣다가 오히려 방광염이 나았다. 또 요로 결석이 빠져나오고 유방암, 신장암 등 각종 암병이 사라졌다. 생명과 빛 되신 하나님 말씀으로 사모들의 죄된 부분을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파헤치니(히4:12) 통회자복 하는 회개가 일어나고 성령 충만해져 질병이 떠나간 것이다.

제3차 세미나를 한 지 6개월 후, 경기 화성시 봉담읍 세곡리 흰돌산기도원에서 제4차 사모영적세미나를 했다. 297㎡(90평) 성전에 사모 1600명이 머리만 보일 정도로 꽉 차게 앉았다. 그것도 모자라 성전 밖에 대형 텐트를 쳐서 임시 성전으로 사용했다. 윤석전 목사는 마이크 줄을 길게 늘려서 강단에서 텐트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설교했다. 윤석전 목사의 설교를 듣고 울부짖어 기도하는 사모 1600여 명에게서 한국교회의 희망이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윤석전 목사는 중직들에게 전국에 다니며 기도원 부지를 찾아보라고 했다. 교회를 산 일은 수많은 영혼 살리려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이기에 아무 걱정 없었다. 하나님은 영원히 부도내지 않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감동하시니 또 기도원 부지를 보러 다닌 것이다.

그러던 중 윤석전 목사는 천안에 있는 59만 5000㎡(약 18만 평) 규모 예비군 훈련장 부지를 보았는데 여러 입지 조건상 좋은 편이어서 계약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성회를 인도하던 충남 대천에 우리 교회 안수집사 둘이 찾아왔다.

“목사님, 흰돌산기도원을 내놨답니다. 우리 교회에서 사면 좋겠습니다.”

윤석전 목사는 집회를 마치자마자 흰돌산기도원에 가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엇보다 노량진 교회에서 자동차로 40분이면 갈 수 있어 마음에 들었다. 노량진성전 잔금을 치르느라 교회 재정이 텅 빈 줄 알면서도 성령께서 강하게 감동하셔서 1995년 2월 흰돌산기도원을 계약했다. 계약금 5억 중 3억은 타 교인이 윤석전 목사에게 사택을 사라고 헌금한 돈이었다.

평생 동대문에서 장사하던 사람이 사업을 정리하자 얼마간 하나님께 몫지어 드리려고 헌금할 곳을 찾던 중 평소 잘 아는 사모에게 윤석전 목사에 대해 들었다고 했다. 교회에서 생활비도 받지 않고 개인 소유 사택도 없이 청렴하게 산다는 말에 감동해 직접 교회로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윤석전 목사가 한사코 만류했으나 이미 하나님께 드리려고 작정한 돈이라며 놓고 갔다. 기도원 계약을 앞두고 한 푼이 요긴한 시기라 그 돈을 계약금에 보탰다. 윤석전 목사는 안수집사 두 명과 재정·행정 담당자를 포함해 6명에게만 알리고 중도금을 치를 때까지 다른 성도들에게는 기도원 계약 사실을 전혀 알리지 않았다. 혹시 믿음 없는 성도가 “노량진성전 구입할 때도 힘들었는데 또 기도원을 삽니까” 하며 실족할까 염려해서였다.

1995년 11월, 잔금을 21억 남겨 놓은 시점에서 성도들에게 기도원을 샀다고 알렸다. “할렐루야!” 전 성도가 일제히 박수하고 환호하며 우리 기도원이 생겼다고 기뻐했다. 우려와 달리 불평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저 축제 분위기였다. 그런 믿음 있는 성도들을 바라보는 윤석전 목사는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에 감사와 영광을 돌렸다.
윤석전 목사는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우리 교회에서 큰일을 할 때마다 돈을 들고 한 적이 없다. 그저 성령이 감동하시면 불도저같이 순종했을 뿐이다. 성령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모든 것을 다 가진 분이시기에 우리는 그저 성령의 감동에 순종만 하면 된다. 만약 우리가 돈을 들고 무슨 계획을 세웠다면 그 믿음의 분량까지만 하나님께서 책임지셨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이 오직 믿음으로 기도원을 샀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이 책임지셨다. 우리 교회가 초창기 사모 세미나를 열 때 경비로 1인당 5만 원 정도 들었는데 성도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며 감당했다. 또 겨울에는 기도원에 온수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아서 우리 성도들이 새벽에 일어나 불을 지피고 드럼통에 물을 데워 사모들 씻으라고 떠다 주었다. 부엌에서는 음식하고 성전에서는 안내하며 하나님의 종을 대하듯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잘 섬겼다. 강단에서는 목사가 목숨을 걸고 설교하고 성도들은 성도대로 최선을 다했다. 참석자 수가 적은 때부터 성령님의 요구대로 주님 기쁘시도록 충성했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마25:21)라는 말씀대로 점차 세미나 규모가 커졌고 이제는 제한 없이 확대돼 전 세계의 대표적인 목회자 세미나가 되었다. 이 모든 영광을 오직 우리 주님께만 돌린다.”     
 

위 글은 교회신문 <47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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